[용환승 칼럼] 우아한 저하 개념의 등장
컴퓨터 분야에서 사용하는 개념인 우아한 성능저하(graceful degradation)는 치명적 오류(catastophic failure)를 피하고자 만들어져, 오류로 인한 손실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의 하나다.
우아한 저하는 고장 상황에서도 안전해야 하는 개념(fail-safe)에서 출발하여 완전한 기능 정지가 아니고 최소한도의 기능을 제공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통신망이 고장나더라도 속도가 저하된 상태에서 비상통신은 가능해야 하며, 디스플레이의 경우도 화질이 저하될지언정 완전히 화면이 먹통이 되지 않도록 시스템을 설계하여 최악의 경우를 피하자는 개념이다.
자동차가 고장이 날 때 도로 위에서 정지되지 않고 고장을 미리 감지해서 길가로 대피시키는 기능은 자율주행에서 특히 중요하다.
컴퓨터가 부팅이 안되는 경우 안전모드 부팅을 제공해서 비상복구 기능을 제공하고, 웹브라우저가 인터넷이 두절되더라도 오프라인 정보를 가지고 접속을 유지해주는 기능도 이에 해당한다.
그래서 인터넷이 복구되면 자연스럽게 웹 검색작업을 지속하도록 한다.
비행기는 엔진이 고장나더라도 날개로 글라이딩 착륙이 가능해야 하고, 바퀴가 나오지 않아도 동체착륙이 가능해야 한다. 그리고 바다 위에서도 빠르게 가라앉지 않게 하여 비상 탈출이 가능하다.
스마트폰은 배터리가 떨어지려 하면 스스로 절전모드로 안내해서 사용자를 당황하지 않도록 배려하기도 한다.
클라우드 서비스의 급격한 다운
지난 7월19일 오후 10시경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클라우드 기능 이상으로 순식간에 수많은 응용프로그램들에 대해서 서비스가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우아한 저하가 전혀 적용되지 못했다.
클라우드를 만든 이유는 원래 급격한 부하증가와 시스템의 장애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서 만든 개념인데, 전혀 제대로 동작하기 않고 모든 것이 멈춰졌으며 디지털로 움직이던 미국을 아날로그 시대로 만들어 버렸다.
문제는 수작업과 같은 아날로그로 동작이 되면 다행이지만 불행히도 아무런 대비가 없었다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였다.
우아한 저하가 아니고 급격한 다운이 이루어져서 모든 서비스를 멈추게 만든 것이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카드로 사후 결제해야만 하고, 호텔에서는 체크인이 되지 않아서 예약 고객이 무작정 대기하거나 다른 호텔을 알아보아야만 했다.
이 때문에 미국 순회 공연중이던 아이유는 비행기 결항으로 아틀란타에서 워싱턴까지 심야에 10시간을 자동차로 이동해야 했다고 한다.
월남전 당시 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만들겠다며 융탄폭격을 하던 미국을 간단하게 마비시킬 수 있는 방법이 생긴 것은 보안 측면에서라도 대처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모든 디지털 서비스는 수작업으로 대처할 수 있는 우아한 저하법을 마련해야 한다.
AI에게 필요한 우아한 저하
현 AI 시스템들이 보여주는 ‘환각’ 또는 ‘헛소리’의 경우 그냥 질문한 내용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답변할 수 없다고 하면 되는 것을, 친절하게 최선을 다해서 그나마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최대한 활용해서 답변하려고 하다 보니 나타난 현상이다.
그 노력을 가상하게 생각해서 애교로 봐줄 수도 있다. 사실 이 응용능력은 창의력과도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지식의 기본이다”는 공자의 말을 돌이켜 볼 때 아직 AI는 모른다고 말하는 법을 모른다.
사람은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는 것을 좋아한다.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그럴싸한 대답을 둘러서 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AI로 하여금 학습하지 않은 내용에 대해서는 대답을 만들어내지 않도록 만드는 것도 중요하고, 물론 잘 모르더라고 학습한 내용을 기반으로 추론과정을 거쳐서 답변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 두 가지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 우리는 아직 AI가 어떻게 해서 현재의 지적 능력을 보여주는 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의 언론 인터뷰에서 조쇼아 벤지오는 “인간의 지능처럼 AI의 작동원리도 알 수 없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우리가 제대로 된 “인공 신경망”을 만들었다는 방증일 수 있다.“고 했다.
AI도 언젠가는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할 때가 올 것이다.
인간에게도 필요한 우아함
사람이 떠날 때 우아함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서 “박수칠 때 떠나라”와 끌려 내려가지 말고 스스로 내려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들 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여기저기 병원에 드나들 일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 서서히 신체의 기능이 떨어짐을 느낀다. 소위 퇴행성 질환들이다.
마음은 30대일지라도 몸은 이미 쇠퇴의 길을 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우아한 저하를 인간에게 적용하면 돌연사와 심장마비와 같이 갑자기 한 사람의 생사가 변하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주변 사람들에게 정리할 시간을 주고 떠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의사들의 말에 따르면 암이라는 질환이 급성인 경우가 없이 서서히 죽어가는 특징을 보여서, 본인과 주위 사람들에게 일종의 우아한 떠남을 주기에 좋은 면도 있다고 한다.
모든 일에서 마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시나브로 서서히 사라지는 이전시간(migration)이 있어야 심리적 충격을 막을 수 있다.
그래서 ‘99884’가 아니고 ‘9988234’로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갑자기 세상을 뜨는 것이 아니고 2~3일의 완충기간을 두고 떠나는 것을 희망한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는 것은 결국은 죽더라도 아름답게 떠나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태양은 지면서 갑자기 어두어지지 않고 노을을 만들며 서서히 어두어지고 새벽에 동트는 것도 마찬가지다.
최후의 순간까지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인 채로 사라지겠다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한편 105세의 노령에도 특강의 일정으로 바쁘게 보내는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극적인 타결만 있는 나라에 필요한 우아한 타결
올림픽이 한창인 지금 승부에서 패했다고 대성통곡하거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화난 표정의 선수가 있는 반면에, 좋은 승부였다고 상대방의 승리를 축하하는 멋진 선수들의 우아한 모습들이 보도되고 있다.
동메달도 세계에서 자신보다 잘하는 선수가 단 2명뿐이라는 것으로 대단한 결과이며, 그래서 국가 순위를 매길 때도 전체 메달 수로 합산한다.
금메달 수에만 집착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심하다. 당초 금메달 5개를 목표로 출발했으나 양궁 종목 전체를 석권한 대한민국은 기뻐할 자격이 충분하다.
특히 10회 전체에 걸쳐서 승리한 양궁 여자단체전 기록은 깨지기 힘든 대기록이 될 것이다.
모든 여성 단체선수가 첫 출전하는 신예들이고 승리의 원인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공정한 선수 선발체계”를 강조한 점이 특히나 자랑스럽다.
공정함이야 말로 국가 발전에서 가장 큰 경쟁력이 될 수 있으며, 여론조사 결과 아직도 우리나라는 63%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조사되었음을 반성할 필요가 있다.
특히 정치와 행정분야의 불공정이 심하다고 국민들은 생각하고 있다.
1970년대에 훌라송으로 운동권에서 불렀던 이 노래의 가사엔 “무릎꿇고 살기보다 서서죽기 원한다”는 부분이 나온다.
1867년 영국에서 작곡되어 군가로 사용되던 노래는 유치원에서 ‘빙빙 돌아라“로 불려지기도 했다. 우아한 저하는 “무릎꿇고 사는 것”이고 급격한 몰락은 “서서죽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사소한 일에도 내세우는 구호가 “결사반대”를 외치며 머리에 띠를 두르고 단식투쟁을 해서 결국 새벽에 막판 ‘극적타결’로 귀결되는 뉴스가 많다.
최저임금 타결도 늘 극적이고, 내년도 예산 심사도 늘 기한을 넘겨서 통과된다.
선진국의 사례처럼 최저임금은 3년 전에 결정되어 미리 준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우아한 저하”의 한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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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용환승(hsyong@ewha.ac.kr)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과 졸업, 대학원 공학박사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연구원, 국가교육과학기술자문회의 전문위원
한국정보과학회 부회장, 한국소프트웨어감정평가학회 회장
현 이화여자대학교 컴퓨터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