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미 칼럼] 맑지만 눈이 내리는 차가운 날이었다. 실내는 따뜻하고 즐거운 웃음이 가득했다. 수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빛난 건 그 날의 주인공 신랑과 신부였다.
그 날 결혼식을 올린 언니의 둘째, 내 조카는 요즘 신부답게 수줍음도 긴장도 없이 인사를 나누었다.
마침내 음악이 들려오고 결혼식이 시작됐다. 두 어머니는 손을 꼭 잡고 입장했다. 평범한 한국인 어머니와 푸른 눈의 미국인 어머니 모두 고운 한복을 차려입었다. 이어 큰 키에 푸른 눈의 신랑이 입장했다. 뒤이어 흰 웨딩드레스를 입은 꽃 같은 신부가 들어왔다.
조카의 결혼식은 그렇게 시작됐다. 1년 전, 미국으로 파견 근무를 갔던 조카는 업무는 뒤로하고 웬 남자를 만나 둘이서 한국으로 들어왔다. 아장아장 걷던 조카가 어느새 시집을 간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모인 나도 그러한데 하물며 부모 마음은 어떠했을까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형부는 딸 시집 보내는 마음이 못내 아쉬웠는지 계속 눈물을 훔치셨다. 결혼 후에도 몇 년간 같이 살 예정이라면서도 신부 아버지의 마음은 뭉클함이 가득한 모양이었다. 형부와 언니도 떨리는 목소리로 신랑 신부에게 덕담을 했다. 신랑의 두 부모 역시 그날 주인공에게 보내는 편지를 직접 읽어주었다. 곧이어 신부의 친구들 중 현직 뮤지컬 배우들이 나와 연말 공연 못지않은 축하 무대도 만들어주었다.
1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신랑의 부모님과 가족들도 흐뭇해 하고 모인 하객들도 이 국제 부부의 결혼을 박수로 축하해주었다. 신랑이 미국인이라는 보기 드문 결혼식이었지만 어색하지 않게 식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예식은 따뜻했고 화기애애했다. 여기서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나와 둘째는 이 모든 예식을 동영상으로 봐야 했던 일이었다.
아이는 귀를 막았다. 스피커에서 하객들은 식이 거행될 예정이니 식장으로 들어오라는 말, 그리고 음악 소리가 무섭다며 나를 잡아 끌었다. 이제 막 결혼식의 주인공과 신랑의 부모에게 인사를 마치고 곧 식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그래. 하루아침에 이런 사람 많은 곳에 음악 소리와 마이크 소리가 거북하고 싫을 수 있지. 하루아침에 적응을 하기란 어려운 일일 거야. 그 마이크를 든 사회자가 아빠였어도 말이야.
다행히 식사 자리에서는 도망치거나 울지 않고 얌전히 식사하고 인사도 했다. 언뜻 스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이의 상태를 이해시킬 필요까지는 없는 분위기여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결혼식 전날 나는 식장에서 처음 만날 사돈댁과 신랑 측 하객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다. 혹시 너무 울거나 떼를 쓰거나 뛰쳐나가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족들을 두고 식장을 나와 바깥을 배회하기에는 날이 너무 추웠고, 먼저 귀가하는 것도 좀 미안한데.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는 핸드폰을 앞에 두고 식사를 하며 사진까지 찍었고, 모인 사람들은 아이가 으레 수줍고 어색해 폰에 고개를 박고 있으려니 하는 눈치였다.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속으로 몇 번 씩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고 되뇌었다.
좋은 날이었다. 신랑 신부는 이 시대의 젊은이 답게 글로벌한 국제 결혼으로 가정을 이뤘다. 부모는 품에서 떠나보내는 자식이 아쉽지만, 다 커서 둥지를 떠나는 아이를 축복했다. 장성한 아이 둘이 새 가족이 되는 그 두 가족, 먼 나라에서 건너온 가족과 이 땅에 오래 살아온 가족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며 따뜻한 말들이 오갔고, 사람들은 축복을 아끼지 않았다. 한마음이 되어 축하하면서 걱정했던 아이는 성숙하고 얌전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뿌듯했던 하루를 마치며 결국 기다려주면 좋아지는 건가 싶어 더없이 기쁜 마음이 되었다.
한 해를 정리하는 이때 내년도 이 날 같은 매일이 되기를 희망하는 연말이다. 믿는 만큼, 나누는 만큼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모두에게 축복과 평화를 전하며 나의 한 해를 마무리 한다 모든 이에게 복된 새해가 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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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동화작가/문화예술사
세종대학교 대학원 미디어컨텐츠 박사
경희대학교 대학원 신문만화
전 명지전문대 글쓰기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