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계식 칼럼] 세종, 문종 시대의 조선은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국이요, 군사 강국이었다. 1983년 일본 동경대 연구진이 기원전부터 20세기까지 세계의 대표적 과학기술 업적을 50년 단위로 편찬한 ‘과학기술사사전’을 발간했다. 이 사전은 놀랍게도 1400∼1450년 사이 50년간의 세계 과학기술 업적 62건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29건이 조선의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대국(大國)을 자처하는 중국은 고작 5건뿐이다. 동경대 연구진을 이끈 과학사학자 이토 야마다는 “15세기에 노벨상이 있었다면 조선이 싹쓸이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1400~1450년 사이는 조선 제3대 임금 태종(1400∼1418)과 제4대 임금 세종(1418∼1450) 시절이며, 제5대 임금 문종은 왕세자로서 과학기술입국에 앞장섰던 기간이다.
세종대왕은 문학, 과학, 수학, 음악 등 다방면에 뛰어난 학자이자 군왕이었다. 세종의 싱크탱크였던 집현전의 학사 99명 가운데 21명이 과학기술자였다고 한다. 세종은 집현전에서 이들 학사와 호흡을 함께했다.
오늘날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훈민정음을 비롯해 천문학, 인쇄술, 지리학, 농업기술, 예술, 무기, 의학 등 당시의 모든 과학기술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이루고 있었다. 이 시대의 과학기술 활동은 세종의 명에 의해 많은 학자의 적극 참여와 협동 및 분야별 역할 분담을 통해 체계적 국가 산업으로 추진됐다. 세종은 1448년 무기 체계의 완성을 대내외에 선포하기도 했다.
이러한 조선의 과학기술 문화와 진취적인 사상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사람이 바로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 즉 제7대 임금 세조다. 수양대군은 형인 문종이 재위 2년여 만에 붕어하자 왕이 되려는 야심으로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 자신의 친동생들을 포함해 세종을 도와 과학기술과 학문을 연구하던 집현전 학사들을 참살했을 뿐만 아니라 세종이 과학기술과 학문의 전당으로 경복궁 안에 세운 집현전도 때려 부쉈다.
이후로 조선의 과학기술에 대한 열정과 전통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뿐만 아니라 수양대군의 집권을 도운 공신들의 특권과 횡포가 극심해 사회 정의를 무너뜨렸고, 이들 공신의 대를 이은 후손들의 특권 의식과 권력욕은 당쟁의 근원이 됐다. 이때부터 조선은 망해 가기 시작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세종, 문종 이후의 조선은 과학기술과 실학을 거부하고 허례허식의 폐쇄적인 사회로 전락해 겨우겨우 명맥을 유지해 오다 결국 1910년 우리가 ‘왜놈’이라고 얕보던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했다.
다행히도 1945년 광복을 맞았으나 얼마 안 돼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세계 역사상 네 번째로 비참하다는 3년간의 민족상잔 비극을 겪였다. 1953년 7월 휴전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문화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선진국으로 우뚝 섰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정말로 ‘놀랍고, 자랑스럽고, 신비한 나라’다. 우리는 불과 50여년 만에 이러한 기적을 이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다.
우리는 오늘날의 영광에 도취해 과거의 고난과 치욕을 잊어선 안 된다. 국가와 민족의 영광 뿐만 아니라 치욕도 잊지 말아야 하며, 과거의 고난을 어떻게 극복하고 오늘날 강대국이 됐는지에 대한 정확한 원인과 과정을 국민 모두가 인식하고 공유할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가 한층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근대국가 건설 후 큰 전쟁을 겪으면서도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해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섰고, 세계 중심국으로 부상하는 행운을 누렸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고 오늘날의 현실에 안주하며 부패한 정치 싸움에 몰입한다면 또다시 쇠퇴와 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역사는 생생히 보여 주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제 더 이상 동북아시아의 주변 국가가 아니다. 우리는 항상 세계를 주시하며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고 세계 중심으로서의 시각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는 폐쇄적 민족 국가가 아니라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세계적 네트워크 국가를 지향함으로써 글로벌 허브 국가들과 경제·문화·정치 등 여러 분야에 걸친 협력을 더욱더 확대·지속해 나갈 뿐만 아니라 번영을 공유함으로써 세계 중심국으로의 위상을 굳건히 확립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