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인 칼럼] 얼마 전 한 고등학교에서 ‘인공지능과 인간 역량’을 주제로 ‘명사 특강’을 했는데,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그 학교에서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는 학생이 “선생님, ‘명사’가 뭐예요?”라고 질문했다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의 ‘어휘력’과 ‘문해력’을 탓하기 위해 이 일화를 꺼낸 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되묻기 위해서다.
현재 대한민국은 공부를 열심히 할수록 역량이 망가지는 교육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 공부는 언제 하니? 책 좀 그만 읽어.” 어른들은 공부하라며 책을 빼앗는다. 독서는 입시에 할애할 시간을 빼앗는 ‘낭비’로 여겨질 뿐이다.
모둠 과제는 불화를 조장한다. 나아가 음악, 미술, 체육 시간이 아까워서 자퇴하는 고등학생이 늘고 있다는 소식도 있다. 저 시간을 아껴서 독서할 리는 없다. 학교는 수면을 위한 장소고 공부는 학원에서 한다. 문제 푸는 법을 익히고 연습하는 것이 현재의 공부다.
역량을 망가뜨린 후에 무엇을 하겠다고?
역량이란 ‘할 줄 한다’는 뜻이다. 어휘력과 문해력 같은 역량은 언어 활동 과정에서 길러진다. 책을 빼앗고 대화를 막는 사회에서 어찌 그 역량이 길러질 수 있겠는가. 요컨대 어휘력과 문해력이 부족하다고 탓하는 담론은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외면한 채 결과만을 꾸짖는 나쁜 담론이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를 때까지 어른들은 무엇을 했던가?
솔직하게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자. 현재의 입시 중심 교육을 통해 과연 아이들의 역량이 길러진다고 생각하는가? 수능 점수가 좋으면 해당 교과목과 관련된 역량이 성장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고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왜 현행 교육 제도를 고수하는가? 공부할수록 아이들의 역량이 퇴보하는데, 왜 작정하고 아이들을 망치는가? 아이들의 역량을 성장시키려는 소중한 시도들은 왜 자꾸 절망하는가? 지금과 같은 공부를 제발 멈추면 안 될까?
‘공정한 선발’이 중요하다는 핑계를 댄다. 몸과 생각의 근력을 훈련할 수 있는 성장기가 거의 끝날 무렵인 20세 언저리까지 아이들의 역량을 짖밟아 놓고서, 역량이 다 소진된 이들에게 대학이 무엇을 줄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고? 날개 꺾인 새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겠다고? 정신병과 자살로 내몰리는 학생들의 소식을 듣지 못했는가? 학생들의 절규가 들리지 않는가? 누구 좋으라고 현행 교육 시스템을 지속하는 건가?
지금 대한민국 교육 시스템은 학생이 가진 모든 역량을 망가뜨리는 학대 시스템이다. 누구나 알고 있다. 예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목소리도 조금 있는데, 예전엔 빠져나갈 틈이 많았다. 지금은 10대까지의, 아니 20대 초반까지도, 모든 삶이 촘촘하게 포획되어 있다. 이 차이를 직시해야 한다. 지금 다른 삶은 별로 가능하지 않다.
날개 꺾인 새들의 저항
책을 읽고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고 운동하고 노는 걸 막는 사회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은 뻔하다. 기운을 꺾고 생기를 빨아먹는 짓이다. 저출생과 인구 감소를 우려한다고? 학대 받으며 자라온 청년들이 온몸으로 저항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지옥의 삶을 더는 물려주지 않으려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다. 이들은 윤회의 고리를 끊고 해탈하고 있다.
날개 꺾인 새들이 더 파괴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는 자기 파괴의 형태로 저항했지만, 언제 돌변해서 바깥의 모든 것을 파괴하려 들지 모른다. 철학자 니체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없을 때 모든 것을 무화시키려는 니힐리즘이 번성한다고 진단했다.
철학적 개념인 그깟 니힐리즘이 뭐 그리 두렵냐고? 니힐리즘이 파시즘과 나치즘으로 불타올랐던 역사를 기억하기 바란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다시 찾아온 극우의 물결도 니힐리즘과 결을 같이 한다. 니힐리즘이 언제까지 남의 일로 머물 거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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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필자 소개
김재인
- 철학자
-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교수
- 저서
〈AI 빅뱅 - 생성 인공지능과 인문학 르네상스〉(동아시아, 2023)
〈뉴노멀의 철학〉(동아시아, 2020)
〈생각의 싸움〉(동아시아, 2019)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동아시아, 2017)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