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의 생태 정신과 공생의 미학
연암의 생태 정신과 공생의 미학
  • 박수밀
  • 승인 2024.04.08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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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밀 칼럼] 연암 박지원은 젊은 시절부터 권세와 이익만을 좇아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세태를 깊이 근심했으며 현실에 실망해 수년 동안 우울증 증세를 겪기도 했다. 연암은 사회 현실을 치유하고 진실한 문학을 하는 돌파구로 자연 사물에 주목했다.

연암이 주목한 곳은 경전의 세계가 있는 고대 중국이 아니라 지금 이곳 생명이 살아 움직이는 조선이라는 삶의 현장이었다. 즉사진취(卽事眞趣), 곧 눈앞의 사물에 참된 정취가 있다. 연암은 내가 지금 바라보는 자연의 삼라만상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문장이자 배움의 공간이라 생각한다.

연암은 사람과 사물이 생겨날 때는 본래 구별이 없었으며 남과 나는 모두 사물이었다고 말한다. 사람은 벌레의 한 종족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초책(與楚幘)」에서는 인간의 지식은 냄새나는 가죽 부대 같은 몸에 문자 몇 개를 조금 더 아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인간이 지각과 깨달음이 있다고 해서 남에게 잘난 척하거나 사물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나무에서 매미가 시끄럽게 우는 건 시를 읊는 것이고 땅속에서 지렁이가 소리 내는 것은 책 읽는 소리이다. 모든 생명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각자 삶의 방식이 있고 삶의 활동을 영위한다. 그러니 인간만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착각에 빠져 자연 사물을 함부로 해치거나 업신여겨선 안 된다는 것이다.

연암은 평소에 사사로이 도살한 고기는 먹지 않았다. 개를 기르지 않았는데 이유인즉 개는 주인을 따르는 동물인데, 기르면 잡아먹지 않을 수 없기에 애초에 기르지 않았다. 나아가 조선의 말 다루는 방법을 말할 적에, 동물의 성질도 사람과 같아서 피로하면 쉬고 싶고 답답하면 시원하게 뻗치고 싶으며 가려우면 긁고 싶다면서 고삐와 굴레를 풀어주어 기분을 마음껏 발산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암은 말도 사람과 똑같은 감정을 지닌 동물이라고 여기고 그러한 인식 아래 말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암이 개를 기르지 않은 것은

도구를 잘 이용하여 삶을 윤택하게 하자는 이용후생(利用厚生)도 단순한 경제 논리가 아니라 사물 생명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연암은 자연을 파괴하거나 착취하자고 말하지 않는다. 이용후생은 인간 우월주의와 문명의 이기(利器)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자연 사물의 본성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쓸모 있게 잘 활용하려는 것이다.

이같이 연암은 자연 사물에서 깨달음을 얻고 자연을 소중한 배움의 공간으로 생각하지만, 인간과 사회는 병들었다고 보고 인간의 위선과 허위의식을 폭로한다. 「호질(虎叱)」에서는 양반의 위선을 풍자하는 데서 더 나아가 문명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자연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묻는다.

범의 입을 빌려 자연(범)의 시선에서 인간의 야만성과 잔인함, 폭력성을 거세게 비판한다. 인간은 생명을 제멋대로 해치고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며 돈을 형님이라고 부른다. 명예를 위해서라면 가까운 사람도 해치고 윤리를 빙자해 자기 이익을 챙긴다. 한마디로 도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연암의 궁극 의도는 인간과 문명을 거부하려는 것이 아니다. ‘범이든 사람이든 만물의 하나’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범과 메뚜기, 누에와 벌, 개미는 사람과 공생(共生)하며 지내야지, 서로 죽고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연암은 모든 생명체는 각자의 쓸모가 다르므로 존재를 우열로 갈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소똥구리가 굴리는 소똥 경단이든 용의 여의주든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쓸모를 지니고 있다. 인간의 입장에 서면 인간이 가장 귀하게 보이지만 하늘의 입장에서는 사람이나 범이나 개미나 모두가 각자 자리에서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이다.

소똥 경단이든 여의주든 저마다

연암은 사물도 귀함과 천함을 구별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본디 버릴 물건이 하나도 없다.”라는 것이 연암이 존재를 바라보는 기본 시선이다. 쓸모없어 보이는 존재도 상황과 조건에 따라 소중한 쓸모를 발휘한다. 모든 것은 각자 소용되는 바가 있으며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다르게 드러난다.

연암이 제시한 평등안(平等眼)은 차별과 우열 의식을 버리고 공평무사한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이다. 석가여래의 혜안을 지니고 온 세계를 차등 없이 보는 마음가짐이다. 연암의 글에 나타나는 소경은 평등한 눈의 소유자를 상징한다. 소경은 앞을 볼 수도 글을 읽을 수도 없기에 선입견이나 기존의 지식에 구속받지 않는다.

소경은 볼 수 없기에 진리의 집을 찾아가는 자이다. 연암은 인간과 사물과 세계를 편견과 차별의 시선이 아닌 평등한 시선으로 보려고 한다. 중심의 자리에서 벗어나 소외된 자리와 보이지 않는 곳을 살핀다. 이른바 ‘군자형’ 인간을 비판하고, 신분과 상황은 천하지만 진실하게 살아가는 인간에게 애정을 갖는다.

연암의 생태적 시선에는 모든 존재가 공생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 궁극의 지향에는 차등적 위계질서와 차별의 세계관을 극복하여 존재의 평등을 실현하고 세계의 다양성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연암의 생태 정신을 과거에 머물게 하지 말고 21세기 현실에서 각종 차별과 차등을 극복하고 인류 보편의 인권과 생명, 다양성의 가치를 모색하는 데에 적용해 가야 할 것이다.

#외부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필자소개

박 수 밀(한양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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