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에 열광하는 민초들의 정치사회학
"영웅이 없는 나라가 불행한 게 아니라, 영웅을 필요로 하는 나라가 불행한 거야.”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는 희곡 ‘갈릴레오 갈릴레이’에서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의 제자 안드레이의 입을 빌어 “영웅이 없는 시대는 얼마나 불행한가”라며 탄식했다.
종교재판으로 상징되는 갈릴레오의 극적인 삶은 워낙 유명하다. 그래서 그는 종교와 권력에 의해 진리를 포기하도록 강요받은 과학자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태양중심설을 공개적으로 포기하고 종교재판정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다는 일화는 권력 앞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고 한 비극적 영웅으로서 갈릴레오를 그려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든 한 영웅의 출현으로 그 시대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당시 시대의 배경에 걸맞게 세계가 변혁되어야만 비로소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 작품에서 브레히트의 시각이다.
영화 ‘명량’이 개봉 11일 만에 누적 관객 900만 명을 돌파했다. 10일에는 1000만 관객을 돌파할 전망이다. 영화 ‘명량’은 1597년 임진왜란 6년, 성웅(聖雄) 이순신 장군이 단 12척의 배로 330척에 이르는 왜군의 공격에 맞서 싸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쟁 ‘명량대첩’을 그린 작품이다.
이른바 영웅 ‘이순신 열풍’이다. 평소 영화관에 가지 않던 50~60대 장년층 남성들마저도 극장으로 이끈 힘은 '구국의 영웅'이 보여주는 든든한 리더십이라는 평가가 많은 것 같다.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忠)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는 영화 속 이순신의 일갈에 관객은 감동을 받고 전율을 한다.
필자도 명량을 관람했다. 128분이라는 상영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 지를 모를 정도로 손에 땀을 쥐며 흥미롭게 영화를 봤다. 주위의 적지 않은 친구들도 이 영화를 봤다고 한다. 만일 이순신과 같은 영웅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미 그때 일본의 식민지가 됐을 것이다.
조선왕조는 500년 역사를 갖고 있다. 세계적으로 단일 왕조가 500년 동안이나 이어진 것은 전례가 별로 없다고 한다. 중국만 해도 역대 왕조가 길어야 200~300여년 정도였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만약 임진왜란 뒤 조선왕조가 망한 다음 의병장이 왕이 되고 실학파가 집권했다면 우리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를 생각해 본다.
아마도 무능한 조선왕조가 그때 막을 내리고 이후 실학파를 중심으로 부국강병 정책을 착착 진행한 끝에 일본보다 빨리 개항,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다면 20세기에 다시 일본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가 되는 수모와 고통에서는 벗어나지 않았을까..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보여준 조선 왕실의 무능함과 비겁함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임금이던 선조는 왜란이 터지자 마자 수도와 백성들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라 평안북도 의주까지 도망쳤다. 대신 이순신이 바다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결성된 의병들의 활약 덕에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특히 이순신의 맹활약으로 당시 백성들은 조정보다 그를 더 따랐고, 이에 따라 위기감을 느낀 선조는 항명죄로 꼬투리를 잡아 이순신에게 모진 고문과 옥살이를 시켰다. 그렇게 보면 왕이지만 선조가 참으로 한심하고 밉다.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했는데도 상투적인 ‘권력놀음’을 거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항상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살인성인의 이순신과 대비될 수 밖에 없다.
당시 조선이 정상적인 기능을 하는 나라였다면 선조를 내치고 새 왕조가 탄생했어야 한다는 얘기를 언젠가 어느 세미나에서 들은 적이 있다.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을 가서 급기야 명나라에 망명을 타진하기까지 한 임금이 전쟁이 끝난 뒤 종묘와 사직을 보존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나 되는가.
1592년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지 꼭 200년이 되는 해였다. 200년간 조선은 너무도 평화로웠다. 오랜 기간 지속된 평화는 국방체계를 무너뜨렸다. 국력에 기울여야 할 에너지는 동서 분당 등 당쟁에 쏟았다. 왜군의 공격으로 선조가 한양 도성을 버리는 순간, 분노한 백성은 경복궁과 창경궁 등 궁궐에 방화하고 형조에 보관하던 노비문서를 소각했다. 4월 30일 서울을 떠난 선조의 권위와 통치권은 사실상 마비되고 말았다.
도성 사수를 주장한 관리 중에 누구도 서울을 지키다 죽은 이는 없었다. 도망가는 선조를 충성스럽게 쫓아가지도 않았다. 한양과 개성에 이어 평양이 함락되자 선조는 아예 명나라 요동으로 망명할 채비를 갖추었다. 이 무렵 육지에서는 의병이 봉기하고 남해안에서는 이순신이 해상권을 장악하여 전세는 서서히 역전되고 있었다. 여기에 명나라 지원군이 참전하면서 평양성을 수복했다. 기세가 꺾인 왜군이 화의에 응하면서 전쟁은 2~3년간 소강상태로 접어 들었다.
그러나 화의가 결렬되면서 1597년 도요토미는 또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이른바 정유재란이다. 통제사 원균이 이끄는 수군이 거제전투에서 참패하면서 이순신이 마련한 수군 기반이 완전히 붕괴됐다. 이순신이 재등용되어 9월 16일 그 유명한 명량대첩에서 왜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후 도요토미가 사망하면서 1598년 11월 18일 노량해전을 끝으로 왜군은 완전히 패퇴하고 만다.
여기까지가 대체적인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스토리다. 임진왜란 후 국가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된 조선은 멸망의 길로 들어서거나 아니면, 국가 재건에 온 힘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멸망도 없었고 국가 재건도 없었다. 새로운 왕조를 세울 힘마저도 잃어버렸다. 조선은 원천적인 쇄신 없이 이어졌고, 지배세력은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했다.
우리가 흔히들 '임진왜란'으로 알고 있는 이 전쟁은 조선 개국 이후는 물론 17~20세기 초까지 동아시아에서 일어났던 가장 큰 규모의 전쟁이다. 6ㆍ25전쟁과 더불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이지만 지금까지 왜란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희생된 조선인만 200만명에 이른다. 그런데 난동으로 치부됐다. 영화 '명량'에서 그려진 이순신 장군의 깊은 고뇌를 보더라도 분명히 왜란이 아니라 전쟁이다. 그런데 지금도 왜란이다.
이는 역사를 기술한 당대 권력자와 그 권력의 계승자들의 '농간'이 아닐까. 전쟁의 참혹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왕과 권력층에 의한 왜곡이라는 의혹이 앞선다. 이 의혹이 사실일 가능성은 전쟁 후 공신책봉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선조는 임진왜란 수습 후 호성공신(扈聖功臣)과 선무공신(宣武功臣)을 책봉한다. 호성공신은 전쟁 발발 10여일만에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주한 선조의 피란길을 수행한 대신들이고, 선무공신은 왜적과 싸운 영웅들이다.
문제는 공신 반열에 오른 이들 중 목숨을 내걸고 전장을 누빈 공신(18명)보다 선조와 함께 도망간 공신(86명)들이 많다는 것이다. 임금이 자기 입맛대로 단행한 자의적인 논공행상이다. 의병장 곽재우를 비롯해 전직 관료와 유생, 승려, 노비 등 자발적으로 왜군에 맞선 이들은 전쟁 후 모두 버림을 받았다. 최악의 논공행상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다.
이런 엉터리 임금 선조가 그나마 잘한 게 하나 있다고 한다. 서애 류성룡(1542~1607년)을 재상으로 등용한 것이다. 류성룡은 이순신을 발탁하고 감싼 인물이다. 조선이 개국 이래 최대 위기를 넘긴 데는 두 사람의 공이 크다.
퇴계 이황의 제자인 영의정 류성룡은 임진왜란 때 3대 개혁을 단행한다. 먼저 군역에서 면제된 양반에게도 군역을 부과했다. 양반과 노비의 혼성부대가 속오군(束伍軍)이다. 동시에 종군 노비에게는 면천법(免賤法)을 만들어 신분상승의 기회를 줬다. 노비가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면 양인으로 속량하고 벼슬까지 주는 법이다. 그러자 노비들이 의병에 대거 지원했다. 양반 사대부의 나라인 조선에서 평시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류성룡은 조세제도에도 손을 댔다. 가난한 사람이 더 내고 부자가 덜 내는 공납(貢納)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작미법(作米法)은 가구 별로 내던 부과 기준을 땅이 많으냐 적으냐로 바꿨다. 당연히 땅 많은 양반 지주들이 내야 할 몫이 커졌다. 양반들은 아우성쳤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진 선조는 류성룡 편에 섰다.
종전이 가까워오자 상황이 급변한다. 한시름 놓은 선조는 동인(東人) 류성룡을 헐뜯는 서인(西人)들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벼슬아치들은 류성룡이 "서얼과 노비 같은 천한 신분을 발탁했다"고 비난했다. 특권만 있고 의무는 없는 양반 사대부의 천국으로 복귀하려는 기득권층의 집요한 공작에 선조는 결국 '전쟁영웅'을 버린다. 류성룡은 선조 31년(1598년) 11월 19일 파직된다. 전시 개혁입법은 무력화됐다. 같은 날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장렬히 전사한다. 류성룡의 파직과 이순신의 전사로 조선은 미래를 잃고 만다.
국가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섰을 때 양반들의 행태는 어떠했던가. 류성룡은 임진왜란이 터진 이듬 해 유급 상비군인 훈련도감을 만들었다. 면천법에 따라 노비들이 훈련도감으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양반들은 훈련도감을 찾아가 제 노비를 다시 끌고 갔다. 지배층다운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커녕 나라를 지키겠다는 백성들의 앞길마저 틀어막은 게 조선의 양반들이다. 이러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양대 참화를 입고도 무슨 개혁이 가능했겠는가 말이다.
‘명량’에서 이순신이 아들 이회에게 했던 묵직한 대사의 뜻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보자. 나라를 구하는 공을 세웠는데도 꼬투리를 잡아 오히려 고문을 가했던 선조가 미웠던 아들 이회는 명량해전 직전 아버지 이순신에게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왜 싸우냐"는 식으로 묻는다. 사실 아들의 질문은 몰염치한 임금 선조를 염두에 두고 아버지 이순신을 겨냥한 힐난이었다.
그러자 이순신은 이렇게 말한다. "의리다. 무릇 장수란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충돌이 일어나는 묘한 위치에 있다.그래서 한반도의 분할통치를 주장하는 요구가 많았다.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를 치러 갈테니 길을 비켜달라(征明假道)"고 했다. 그러나가 일본은 1597년 정유재란 당시엔 조선 분할을 주장했다. 한반도 남쪽인 경기-충청-전라-경상도를 자기들에게 내달라고 요구하다가 조선을 재침략했다.
300년 후 청일전쟁 직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진다. 청일전쟁을 막으려고 한반도 북부는 청나라에, 남부는 일본 세력권에 두자는 안이 나왔다. 평안·함경·황해 3도는 청나라에, 경상·충청·전라·강원 4도는 일본에 주고, 조선 왕은 경기도만 지배하게 하자는 방안이다. 그러자 일본이 한반도 전체를 손아귀에 넣으려고 청일전쟁을 도발했다.
세월호 참사 과정에서 보여준 정부와 정치권의 무능이 이순신의 리더십과 비교되면서 극적인 대비를 이룬 것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순신은 사지(死地)와도 같은 조류에 휘말리며 12척(13척)의 배로 330여 척(난중일기엔 133척)의 왜군을 격파해 조선과 백성을 구했다. 반면 그로부터 417년이 흐른 2014년 박근혜 정부는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300여 명의 국민 중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했다.
오늘날 한국이 처한 현실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주변 강대국이들이 마치 한반도를 서로가 먼저 집어먹으려고 으르렁대는 꼴이다. 더욱이 극우화하는 일본과의 갈등, 침체된 경제, 세월호를 비롯해 이어지는 사건사고…. 국민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공유하며 강력한 리더십을 갈망한다.
옛날엔 이순신이라는 걸출한 영웅이라도 있었다. 권력의 무능함과 약자들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시대의 결핍 앞에 진도 팽목항 앞바다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300여명의 어린 학생들을 생각하면 지금이 임진왜란 때보다 오히려 더 못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권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면 백성들은 언제나 영웅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지금 이 땅에 거세게 부는 이순신 신드롬은 결국 약자들 편에 서 줄 영웅에 대한 민초들의 갈망이 아닐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요 사학자인 신채호 선생이 ‘영웅대망론’을 쓰며 새롭게 조명한 인물이 바로 이순신이다. 위기가 심화되면서 리더에 대한 불신은 높아진다. 의리와 원칙을 지키면서 어려움을 돌파한 이순신 리더십이 좌표를 잃고 표류 중인 우리 사회에 뭔가 해답을 던져준다.
영화가 끝나갈 때 마지막까지 왜군과 싸우다가 살아남은 배 안에서 노를 젓던 누군가가 외친다. "나중에 후손들이 우리가 이렇게 개고생 한걸 알까 모르겠네! 모르면 호로 자식이제-". 이 대사에 아마도 집권층 인사들의 가슴이 뜨끔할 것이다.
저작권자 © 서울이코노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