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기 칼럼] 조선시대의 수령은 지방의 행정, 사법, 재정, 군사 등 거의 모든 분야를 국왕을 대신하여 관장하는 작은 왕과 같았다. 다만 국왕에 의해 임명되어 지방이라는 공간적 한계 안에서 통치하였고, 임기가 제한된 시간적 한계를 지녔을 뿐이다.
〈목민심서〉는 바로 이러한 수령의 지방행정 지침서였다. 책의 내용은 철저하게 수령들을 독자층으로 삼아, 수령이 지녀야 할 기본 소양과 지방행정의 이념, 그리고 당면한 현실 문제에 취해야 할 적절한 원칙들을 다루고 있다.
수령은 왕명의 대행자로서 지방통치의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었다. 조선은 일찍부터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확립하고 지방에 대한 공적 통치조직으로 군현을 두었다.
중앙에서 이 군현들에 파견된 수령들은 왕의 원칙과 국가의 이념을 지방에 실현하는 첨병 역할을 하였다. 이들이 자신의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지방의 백성을 올바르고 부유하게 부양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목민관(牧民官)이라 불렸다. ‘목민’은 백성을 부양한다는 뜻이다.
〈목민심서〉에는 각 방의 실무에 대한 지침을 통해 당시 조선사회를 구할 여러 정책들이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정책들은 결국 목자의 청렴을 통해 실천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정책을 시행할 때 공직자의 청렴이 지향하는 목표는 청렴 그 자체가 아니라 청렴을 통해 국가의 재정을 튼튼하게 하고 백성들의 삶을 넉넉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따라서 〈목민심서〉 교훈을 청렴으로만 한정하는 것은 이 책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한 것이 아니다. 〈목민심서〉가 지향하는 목자의 청렴은 반드시 〈경세유표〉가 지향하는 부국유민(富國裕民)과 결합되어야 되는 것이다. 사실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는 대대(待對) 구조를 갖고 있다.
실무 지침서(매뉴얼)에서 리더십 지침서로
오늘날 과거의 신분제 사회와는 달리 누구나 관리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정치가가 될 수 있지만 영도하는 사람과 영도되는 사람으로 구분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리더(Leader)는 최고위의 영도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만 모여도 리더와 팔로워(Follower)가 존재한다. 이 관계는 늘 존재하기도 하고, 사안에 따라 그 관계가 뒤바뀌기도 한다. 리더는 다른 사람보다 앞서서 결정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목민관은 바로 오늘날의 리더로 재해석할 수 있다.
〈목민심서〉 리더십의 핵심은 바로 리더가 시공간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약용은 제1 '부임'편에서부터 리더가 해야 할 일로 시공간의 장악을 수없이 언급하고 있다. 지방행정의 시간표를 만드는 것과, 부임지의 사경도를 그리는 것이 목자의 첫 번째 업무이다.
시간표 작성은 곧 시간을 장악하는 것이다. 일을 잘 아는 체하고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여 두리뭉실 의심스러운 것을 그냥 삼킨 채 다만 문서 끝에 서명하는 것만 착실히 하다가는 아전들의 술수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어리석은 목자와 게으른 목자는 아전들의 서류에 서명하는 일로 업무를 다한 것처럼 느낄 것이다.
따라서 목자는 업무의 시간표를 만들어 반드시 스스로 어기지 않아야 하며, 백성들에게도 기한을 철저히 지킬 것을 엄히 단속해야 한다. 관청의 일은 기한이 있는데 기한을 지키지 않는 것은 곧 백성들이 명령을 희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경도를 그리는 것은 곧 공간을 장악하는 것이다. 정약용은 지도 상에 강줄기와 산맥은 실제와 꼭 같게 그리게 하고, 동서남북의 방위를 표시하게 하였으며, 마을 단위의 이름과 거리, 마을의 인구를 적시하게 하였다. 또한 큰길과 작은 길, 다리, 나루터, 고개, 정자, 객점(客店), 사찰(寺刹) 등을 모두 그려 놓도록 하였다. 게다가 이 지도는 아주 상세할 필요가 있다.
시간과 공간을 장악하고, 위엄과 신뢰를 겸비해야
먼저 경위선(經緯線)을 그리고 1칸을 10리 단위로 하되 1백 호가 있는 마을은 호수를 다 그려 넣을 수 없으니 집이 조밀하게 있는 모양을 그려서 큰 마을임을 알게 하도록 할 것이며, 한두 집 골짜기에 있는 것도 빠뜨리지 말도록 하였으며, 기와집과 큰 집도 표시하여 토호(土豪)의 집임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부임지의 인정과 풍속을 살필 수 있고 고을의 사정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목민심서〉 리더십의 또 하나의 핵심은 바로 신뢰와 위엄을 겸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통솔하는 방법은 위엄과 신뢰일 뿐이다. 위엄은 청렴에서 나오고 신뢰는 충실함에서 나오니, 충실하고도 청렴할 수 있다면 사람들을 통솔할 수 있다.” ( 〈목민심서〉 제5편 '이전', 제2조 어중(馭衆))
정약용은 목자가 지녀야 할 덕목으로 위엄과 신뢰를 들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위엄이 청렴에서 나오고 신뢰는 충실함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청렴은 쉽지 않기에 자연히 위엄이 서게된다. 위엄과 함께 리더십의 또 한 축인 신뢰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신뢰란 우선 약속을 잘 지키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정약용은 신뢰의 근원으로서의 충실(忠)의 내용을 편향 없는 공명정대함으로 보는 것 같다.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사심을 부려서는 안 되며, 언제나 공명정대해야 한다. 약속을 잘 지키고 공명정대하면 자연히 신뢰가 형성된다. 이렇게 리더십은 위엄과 신뢰의 결합을 통해 완성된다.
필자는 최근 ‘목민심서 집담회’에 참석하였는데, 주제는 ‘〈목민심서〉의 현대적 가치와 활용방안’이었다. 여기서 필자는 목민심서의 현대적 독법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첫째, 매뉴얼보다 리더십 지침서로 활용해야 한다. 둘째, 구체적 정책보다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바람직한 리더 상을 부각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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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다산칼럼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 것입니다.
필자 소개
황 병 기
- 서경대학교 동양학과 특임교수
- 대진대학교 인문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 (전)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 연구교수
[주요 저서]
〈여가, 선인들의 지혜와 여유〉, 〈동아시아와 문명 : 지역공동체 지평의 인문실크로드〉, 〈인문학 리더십 강의 1〉, 〈길 위의 인문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