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서 칼럼] 올림픽에 푹 빠져 지냈다. 올림픽 홀릭(중독)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거의 날마다 자정을 넘겨 TV중계에 몰입했다. 눈을 붙였는가 싶다가도 주요 경기 ‘본방 사수'를 위해 새벽 3~4시에 TV를 다시 켠 적도 여러 차례다. 수면 부족으로 낮 시간에는 힘들기도 했다. 눈은 감기고, 머리는 멍하고, 몸은 가라앉았다. 하지만 중계방송이 시작되는 저녁 시간이면 다시 말짱해졌다. 스포츠를 마약에 비유하는 것은 이런 중독성 때문일 수도 있다. 그 덕에 이번 여름 특히 심했다는 열대야는 잊고 지냈다.
원체 스포츠를 좋아하기는 편이기는 하다. 하지만 주변을 살펴보면 비슷하게 지낸 이들이 꽤나 된다. 평소 스포츠에 무관심했던 사람도 더러 있는 것 같다. 한국 선수단의 ‘서프라이즈’ 성적이 많은 국민들을 ‘올림픽 중독자’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우리 대표선수들의 활약은 초반부터 눈부셨다. 개막 이틀 후 펜싱 오상욱과 여자 10m 공기권총의 오예진을 시작으로 금빛 행진이 이어졌다. 양궁의 5개 전 종목 석권까지 더해지면서 칼과 총과 활을 합쳐 “쏘는 족족, 찌르는 족족 메달”이라는 탄성도 나왔다.
스포츠에 빠지는 것은 역시 승부 때문이다. 승자와 패자가 선명히 갈리기에 한편으론 잔인하면서도, 짜릿하며 감동적이다. 여기에 우리 편, 그 것도 국가대표가 나서는 경기라면 흥분과 감동은 몇 배로 증폭될 수밖에 없다. 그 무대가 세계 최정상을 가리는 올림픽 무대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 선수들은 여기에다 단 한방에 승자를 가리는 ‘각본 없는 드라마’까지 연출해 모두를 열광케 했다. 여자 10m 공기소총의 반효진이 대표적이다. 다 이겼던 경기를 마지막 발의 어이없는 실수로 동점을 만들어 주었을 때는 “이제는 졌다”는 생각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슛오프 한 발의 결과는 10.4대 10.3, 불과 0.1점차의 피말리는 승리였다. 중계 멘트 대로 표현하면 17살 여고생이 전국을 들었다 놨다 한 것이다.
올림픽에 속절없이 빠져 든 것도 반효진의 승리가 결정적인 계기였던 것 같다.
양궁 김우진의 개인전 결승전도 이에 못지않다. 최종 한 발 슛오프에서 불과 4.9mm 차로 이긴 상황은 모두의 가슴을 쫄깃쫄깃하게 만든 최고의 명승부였다.
금메달 13개, ‘역대 최다’ 동수…총메달 32개로 두번 째로 많아
이러한 승리의 순간들이 어우러져 한국은 파리올림픽에서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금메달은 13개로 역대 최다였던 2008년 베이징, 2012년 런던 올림픽과 동수다. 은메달은 9개, 동메달은 10개로 총 메달 수는 32개다. 33개로 최다인 1988년 서울올림픽에 불과 1개 모자란 놀라운 성적이다.
당초 기대치와 관심은 낮았다. 한국 선수단 규모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최소 규모인 140명이었다. 핸드볼을 제외한 축구 등 단체구기 종목이 모조리 본선 진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대회 목표도 ‘금메달 5개, 종합순위 15위’였다. 목표를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잡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 뒤늦게 나오지만, 부정적 전망치는 체육계 내부에 만연한 자신감 부족 때문이었던 것도 부인키 어렵다.
무엇보다 오랜 기간 사회복지 차원에서 ‘생활체육’이 강조되면서 국가대표 등 ‘엘리트 체육’에 대한 지원이 크게 위축된 것이 문제였다. 여기에는 과거 권위주의 시절의 엘리트 체육 전폭 지원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 부분 작용했다. ‘메달 지상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등 얘기가 공공연히 나오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주요 종목의 회장사를 맡아 왔던 대기업들도 하나 둘 발을 뺐고, 지원 규모는 급감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다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춘 생활체육 종목에는 선거를 의식한 ’정치바람‘까지 가세했고, 정작 중요한 선수 관리와 육성은 뒷켠으로 밀리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배트민턴 금메달리스트 안세영의 ’작심발언‘ 파문도 이러한 사정과 무관치 않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한국 선수단은 누구도 예상 못한 반전 드라마를 썼다. 쾌거의 배경으로는 성공적인 세대교체, 올림픽 무대를 처음 밟은 신예들의 맹활약이 꼽힌다. 사격의 ‘영건 3총사’, 17세 반효진과 여자 10m 공기소총의 19세 오예진, 25m 권총의 21세 양지인이 대표적이다.
‘올림픽 신예’들의 서프라이즈 활약으로 ‘반전드라마’ 완성
올림픽 10연패를 달성한 여자 양궁 전훈영‧임시현‧남수현 ‘3총사’도 올림픽에는 처음 출전한 ‘올림픽 신예’다. 그런데도 전혀 흔들림없이 상대 선수를 압도했다. 제 아무리 화려한 경력이 있어도 예외 없이, 오로지 성적만으로 대표선수를 선발한 체계적인 시프템이 위업 달성의 비결로 꼽히고 있다. 회장사인 현대차그룹의 40년 후원이 결정적 밑바탕이 됐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금메달 3개, 은메달 3개 성적을 거둔 사격도 한화그룹이 20년 넘게 회장사를 맡아 지원을 한 덕을 톡톡히 봤다고 한다. 한화는 지난 해 11월 회장사를 그만둘 때까지 200억원을 발전기금으로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다. 세계적인 선수나 팀을 육성하려면 그에 걸맞는 정책적‧재정적 뒷받침이 필수다. 여자 사격의 ‘영건 3총사’ 등은 오랜 기간 잘 관리하며 키워야 할 국가적 소중한 자산이다. 이를 위해서는 엘리트 체육에 대한 일각의 부정적 인식을 접고 지원을 대폭 확대하는 쪽으로 궤도수정을 해야 한다. 대표선수들에 견줄 만한 ‘신예’들이 계속 나타나도록 스포츠클럽 육성에도 열성을 다하는 ‘투트랙 전략’으로 가야한다는 전문가들의 견해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논란은 계속되지만 올림픽은 국가대항전처럼 치러지고 있다. 메달 색깔이, 메달 수가 국민적 자긍심이고, 국력의 상징처럼 평가받고 있다. 보름 넘는 올림픽 기간 동안 밤잠을 설쳐가며 우리 모두는 한 마음으로 목청껏 응원하고, 환호하고 감동했다. 우리 선수들이 세계 정상급 선수들과 당당하게 겨루는 모습에 자부심을 느꼈다. 관련 기사에는 “희망을 봤다”, “살맛을 되살려주었다” 는 등 찬사 댓글이 넘쳤다.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뿌듯하고도 행복한 시간과 추억을 안겨준 대표선수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필자 소개>
-서울이코노미뉴스 부회장
-전 서울이코노미뉴스 대표, 주필
-전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심의실장
-전 서울신문 편집담당 상무
-전 서울신문 사회부장, 정치부장, 논설위원, 편집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