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올라갈수록 용장(勇將)보다는 지장(智將)이, 지장보다는 덕장(德將)이 필요...박수의 방향은 언제든 바뀔 수 있어
[윤영호 칼럼] 꼬투리를 물고 늘어지며 누군가에게 막무가내로 압력을 행사하거나 가혹하게 갑질을 한다면, 누군가는 괴롭힘을 당하고 있고, 누군가는 괴롭히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내가 못 먹을 감이라고 해서 찔러버리듯, 상대에 대한 괴롭힘 자체가 목적이 되는 모양새다.
이 때, 애매하게 괴롭힘을 당하는 약자의 모습은 국민의 감정에 측은지심을 발동시키며 나아가서는 반전의 상황으로 전개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소화불량에 걸린 듯 국민적 감정이 불편하게 되고, 언젠가는 갑과 을이 뒤바뀌게 될 날을 은근히 소망하게 된다. 이것이 보복과 권선징악(勸善懲惡)에 길들여진 국민의 일반적 감정이고 괴롭힘의 역설이다.
영악한 정치선수들이 이를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과잉연기를 해서라도 피해자 코스프레를 함으로써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을 형성한다. 자신의 부족한 선(善)함을 내세우는 것보다 상대를 악(惡)한 모습으로 크게 부각시키는 소위 네거티브 전략이 국민감정에 당장은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정도가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것이 만고의 진리다. 더구나 앙갚음을 위해 해코지하는 것은 언제나 지나치다. 가해자가 느끼는 주관적 가해분량보다 피해자가 느끼는 주관적 피해분량이 언제나 월등히 크기 때문이다. 그러니 양측간에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세월은 교대로 지속되며 이 땅에 보복의 역사는 끊이질 않는다.
결국 이러한 내분은 외세의 침략 쓰나미가 들이닥칠 때 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사리사욕이나 한풀이를 목적으로 하는 갑질은 괴롭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니면 말고’식 막무가내 해코지놀이는 무책임을 넘이 해악이다. 뿐만 아니라 해코지하는 상대를 본래 의도와는 반대로 체급만 키워주는 아리러니를 낳는 경우도 허다하다.
우리는 ‘갑질’의 오만과 괴롭힘을 증오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순간적으로라도 어떤 상황에서 유리한 샅바를 쥐게 되면, 은근히 상대를 제압하여 억누르려는 유혹에 빠진다. 문제는 신분이 힘의 우월적 지위가 있다고 해서 언제나 갑질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약자라고 해서 언제나 갑질을 당하는 것도 아니다. 을의 위치에서도, 약점을 가지고 막무가내로 갑을 괴롭힐 수 있다면 이 또한 명백한 ‘갑질’이다.
이 땅에는 영원한 갑도 없고 영원한 을도 없어
최근 악성민원인의 폭언, 협박등 괴롭힘을 못이기고 숨진 김포공무원의 사망사건이나, 학부모의 갑질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목숨을 끊은 교사의 사망사건이나, 종업원이 기업주의 약점을 붙잡고 협박하여 돈을 뜯어내려는 행태나, 수업 중에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어대며 가르치는 선생님에게 행패에 가까운 무례를 범하는 학생이나 이들 모두의 행동은 분명한 괴롭힘이고 갑질이다.
말로는 을이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갑질을 하는 역차별이요, 낚시 바늘로 코를 꾀고 몸통을 흔들어대는 대표적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약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갑질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과거 갑질에 대한 무리한 반작용이 새로운 갑질 부작용을 낳은 것이다.
이렇듯 이 땅에는 영원한 갑도 없고 영원한 을도 없다. 다만 갑질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부당한 갑질은 결국 또 다른 갑질을 양산하고, 그 부메랑의 화살을 우리 모두가 맞는다. 상생해야 할 무대가 ‘너 죽고 나 사는 제로섬 게임’ 전장터로 변했다. 인류가 애초에 이런 형태로 살아왔다면 우리는 맹수의 밥이 되어 멸종상태에 있을 것이다.
태어날 때 개별적으로는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연약한 것이 우리들이지만 다른 맹수와 달리 우리 인간은 수백만이 소통하고 협업할 수 있는 지혜의 축적과 상생의 기술이 있었기에 오늘날 최상위 위치에서 만물의 영장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못 먹는 감 찔러서 없애는 것보다는 남이라도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야 이 후 나에게도 돌아올 기회를 예약할 수 있지 않겠는가? 너 죽고 나사는 것보다는 너도 살도 나도 함께 사는 상생의 원리를 터득하였기에 오늘날 우리가 고도의 문명을 함께 누리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종업원 월급 주는 것이 아까워서 기업을 키우지 않았다면 오늘날 한국의 국부(國富)는 없을 것이다. 이웃이 발전된 문명을 함께 누리는 것이 배아파서 기술을 개발하고 공유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고도의 과학문명은 없을 것이다. 사회적 인프라가 나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사회적 안전이 나의 안전의 근간임을 확연히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 각자가 누리는 안전과 문명의 편리함이 세종대왕이 누린 그것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산업이나 과학영역이 이러할 진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지향하는 정치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누가 갑질을 하는가? 올라간 자인가? 올려놓고 흔드는 자인가? 어느 경우든 지나치게 괴롭히는 자가 갑질 하는 자다. 결국 갑이던 을이던 목을 유연하게 숙이면 살고, 빳빳하게 세우면 죽는다. 초급장교시절 ‘도피 및 탈출’ 이라는 유격훈련을 받기 위해 지리산 노고단에 오른 적이 있다.
차면 기울고 모이면 흩어지는 것이 우주의 순리
높이 올라 정상에 가까울수록 벼락맞아 죽은 나무들이 곳곳에 보이고 예외 없이 키 작은 나무들만 생존하여 산을 지키고 있는 실존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총탄이 날아오는 전장에서 낮은 자세로 포복하면 살고, 고개를 뻣뻣이 치켜들면 여지없이 실탄의 타겟이 된다는 것을 생생하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지금 우리나라 정치기상도는 나라 전체가 온통 전쟁터와 같다. 소리 없는 아우성과 총성 없는 전쟁처럼 살벌하고 냉엄하다.
항용유회(亢龍有悔)라는 말이 있다. 역경(易經) 건위천(乾爲天)에 나오는 이 말은, 하늘높이까지 오르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긴다는 말이다. 달이 차면 기우는 일만 남듯, 다 오르면 내려올 일만 남기 때문이다. 이는 원천적으로 도전을 포기하고 오르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그에 따른 리스크를 경계하라는 교훈이다.
어차피 올라가면 언젠가는 내려올 일만 있다. 모두들 최고가 되지 못해 안달이지만, 차면 기울고 모이면 흩어지는 것이 우주의 순리다. 그러기에 우리는, 순리를 어기면서까지 무리하게 오르려 하지 말고 올라갈수록 족한 줄 알아 삼가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 동서고금을 어우르는 현언(賢言)이 아닐 수 없다.
정상에 오르면 초심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어 ‘소통의 역설’에 빠지기 쉽다. 코를 꿴 낚시대를 붙잡고 있으면 흔들고 싶은 신종 ‘갑질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연고로 후회할 일이 생긴다. 이는 여야를 막론하고, 갑의 위치에서나 을의 위치에서나 누구나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이를 초월할 수 있는 인물이 덕장대인(德將大人)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용장(勇將)보다는 지장(智將)이, 지장보다는 덕장(德將)이 필요하다. 주요 내력기둥이 너무 잔인하거나 자주 흔들리면 집 전체의 안전이 흔들리고 백성의 피로도는 증가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 모두는 죽는다. 모두가 죽을 사람들끼리 그냥 놔둬도 죽을 생명을 괴롭혀서 더 빨리 죽게 할 필요는 없다. 처절하게 괴롭히는 자가, 싸움 즐기는 지지자에게 순간 박수를 받을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행복할 수는 없다. 박수치면서 행복한 것은 장구하지만, 박수 받아서 행복한 것은 순간이다. 박수의 방향은 언제든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한 것에서 오는 기쁨은 질투를 유발하는 불안정한 행복이지만, 평범한 것에서 오는 기쁨은 배 아픔이 없는 안정된 행복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 남을 괴롭히고 특별한 것을 추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상생하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가? 정치인이든, 법조인이든, 경제인이든, 일반 국민이든 누구나 공히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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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사) 서울이코노미포럼 공동대표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더뉴스24 주필
전 HCN지속협 대표회장
전 ㈜ 한림MS 기획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