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코노미뉴스 김준희 기자] 정부가 연구개발(R&D) 예비타당성조사(예타) 제도 폐지를 검토하고 있다. 대신 부처 간 중복·유사 R&D를 방지하기 위한 범부처 차원의 사업 심의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복안인 것으로 알려졌다.
R&D 예타는 양자 기술 등 500억원 이상 대형 사업의 경제성을 평가하는 제도다. 심사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등 글로벌 경쟁의 걸림돌이라는 지적을 받아왔고, 과학기술계가 오래전부터 폐지를 요구해 왔다.
29일 과학기술계에 따르면 정부는 다음 달 열리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R&D 예타 개편안을 포함한 R&D 시스템 개편안을 발표할 것으로 전해졌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전날 심야에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R&D 다운 R&D 투자강화를 위해 관련 제도 개편을 검토 중이나, 세부적인 내용은 아직 결정된 바 없다"고 했지만 핵심 관계자는 "기획재정부와 과기정통부가 협의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개편안은 예타를 없애 미래 원천 기술 개발에 신속하게 착수할 수 있도록 하고, 부처별 ‘예산 나눠 먹기’를 방지하기 위해 범부처 차원에서 과제를 통합 심의토록 한다는 게 핵심이다.
이에 맞춰 지난해보다 4조6000억원 삭감된 R&D 예산은 내년에 복구될 전망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6월 부처 간 나눠 먹기 등 국가 R&D 시스템의 비효율을 지적했다. 이후 시스템 효율화 작업 중 올해 R&D 예산이 대폭 삭감됐고 과학기술계는 반발했다.
정부는 이번 예타 폐지와 부처 간 중복·유사 예산 문제 해결이 과학계의 R&D 카르텔 문제를 혁파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예타는 500억원 이상 대규모 사업을 추진할 때 사전에 경제성 등을 평가하는 제도로 2008년 도입됐다. 지난 15년간 314개 사업의 예타가 실시돼 그 가운데 184개 사업(약 62조1000억원)이 수행됐다.
하지만 과학기술계는 예타가 R&D를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지적해 왔다. 예타는 5~10년간의 자세한 연구개발 계획과 연도별 목표, 구체적인 성과물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빠르게 변하는 첨단 분야에서 장기간의 계획을 처음부터 완벽하게 제시하는 것은 난제일 수밖에 없다. 한 번 계획이 확정되면 이후 이를 바꾸지 못하기 일쑤였다.
특히 예타 심사 기간은 7개월로 정해져 있지만, 보통 1년이 넘어가는 경우가 많고 특히 정치적 쟁점이 있는 경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표적인 예가 ‘양자 과학 기술 플래그십 프로젝트 사업’이다. 8년간 9960억원을 들여 양자 컴퓨터, 양자 통신 분야의 핵심 기술을 개발하는 사업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해 4월 예타를 신청해 연말 통과를 목표로 했지만, 한 차례 연기됐다. 한 번 더 연장해야 한다는 말이 나도는 등 내년 예산 반영이 불확실하다.
R&D 예타를 폐지하면 양자 기술 외에도 인공지능(AI) 반도체 등 첨단 기술 개발에 속도가 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예타를 폐지한 만큼 R&D 평가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방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우선 과제 선정 때부터 민간 전문가를 더 많이 참여시킬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 미국·일본 등 주요국들은 대형 R&D 투자에서 사전 평가 체계를 두고 있다.
전문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한 전문가는 “과학기술뿐 아니라 경제·정책 전문가들도 포함해 제대로 된 평가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의 R&D처럼 계획을 중간중간 수정하면서 성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