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호 칼럼] 국회의원 총선이 드디어 끝났다. 선거가 과연 민주주의의 꽃인가? 국론분열의 장인가? 헷갈릴 정도로 서로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동안 각 정당마다 예측해온 정치 판도가 검증되며 현실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정치권에 대한 유권자 인식의 적확성 여부와 상관없이 국민의 표는 던져졌다. 이제부터 전개되는 정치의 흐름은 싫든 좋든 오롯이 국민의 운명이다.
이제 당선된 정치인들이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표를 얻기 위해 자신의 마케팅 멘트로 외쳤던 말들에 대하여 얼마나 진지하게 되새김질 하느냐에 따라 질곡의 역사가 되풀이되느냐, 합리와 공정의 새 역사가 구현되느냐 하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국민만 바라보고 가겠다’ ‘국민 눈높이에 순응하겠다’는 약속이 초지일관해서 정직하게 이행되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하겠다.
그렇다면 국민 눈높이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첫째, 정치 행정의 공정이다. 힘든 건 참지만 공정하지 못한 것은 참지 못하는 것이 특히 젊은 유권자들의 분명한 성향이다. 다같이 힘들면 함께 감내하겠지만, 그 누군가의 불공정이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가해요인이 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한 마디로 특권이 없는 세상, 누구나 공정하게 기회를 접할 수 있는 세상을 원한다. 그동안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학폭은 사회폭력의 씨앗이 되었고, 아빠찬스는 세상 불공정의 씨앗이 되어왔다. 드러나지 않던 비리 일부를 통해 대표적인 불공정의 사례를 단적으로 전해주는 메시지다.
유권자가 입혀준 한시적 권력의 옷을 개인의 권위로 착각하지 말기 바란다. 비싼 옷을 걸었다고 해서 그 옷걸이 자체가 비싼 것은 아니다. 권위의 의자에 앉았다고 해서, 앉은 그 사람이 권위자체는 될 수 없다. 국민의 눈높이 공정을 저해하는 가장 큰 장애는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에 대한 불공정이다. 아니면 지인들 앞에서 부리는 객기와 신세 진 사람들에 대한 편파적이고 불법적인 보상이다.
누구보다도 불공정의 주범이 되기 쉬운 존재가 당선된 자기 자신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부여해준 권위는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서 공정하게 일해야 하는 공적 도구라는 점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오만하면 망함. 교만은 넘어짐의 앞잡이
둘째, 정치인의 겸손이다.
골프와 정치는 고개를 드는 순간 망한다는 것이 만고의 진리다. 한마디로 오만하면 망한다. 교만은 넘어짐의 앞잡이가 분명하다. 마네킹은 어떤 옷이 입혀졌느냐에 따라서 보이는 모습이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느 직책, 어느 직분에 있느냐, 혹은 어떤 끝 발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을 보는 권위나 느끼는 가치는 전혀 달라져 보인다.
그러나 마네킹은 어떤 옷이 입혀지거나 벗겨져도 그 얼굴형상은 변함이 없다 우쭐대거나 섭섭해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은 마네킹과 달리 화려한 공적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자리에 대한 권위를 자신의 권위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높이 올라갔던 만큼 공허함과 불행감은 더 크게 될 것이다.
마네킹과 옷이 별개이듯이 나 자신은 내가 걸친 유니폼이나 직책과 엄연히 별개다. 자리에 따라 천당과 지옥을 오가지 않으려면, 입은 옷과 앉은 직분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인품을 가꿔 보시기를 권한다. 천으로 만든 옷이나, 사회가 부여한 권위의 옷을 벗고, 벗겨진 자신의 알몸, 순수한 인격의 진면목을 돌아 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없어지지 않는 내 인격의 옷을 지켜 나아갈 수 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도 겸손이요. 나서야 할 자리, 멈춰야 할 자리를 아는 것도 지혜다.
셋째, 국민 생활의 안정과 번영이다.
나는 왜 국회의원이 되었는가? 출마의 진정한 목적이 공약이었나? 사익이었나? 출세 자체가 최종 목적인가? 공익적 가치와 자아실현을 위한 수단이었는가?
만약 돈과 권력을 탐해서였다면 또는 정치보복이나 개인적 복수를 위해서 였다면, 그에 대한 타당성과 실현가능성을 다시 한번 재고해 주기 바란다. 이는 본인이나 가족이나 세상에 유익함을 남기기 보다는 또 다른 갈등, 분노, 불안이 되풀이 되는 윤회의 씨앗이 된다. 개인 원수 갚고 정치보복 하라고 표를 몰아준 유권자는 일부 한정돼 있다. 극단적 싸움에서 쾌감을 느끼는 일부 강성지지자들 뿐이다. 그 분들의 표만으로 공권지위에 당선되기에는 어림도 없다. 대부분의 중도층 유권자는 화평을 원한다.
이러한 개념정리가 되지 않은 정치권력자는 교도소 담장위를 걸어가는 것과 같다. 언제든 교도소 담장 안 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유혹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공권력을 사적 용도로 사용하면 권력남용
보복하기 위해서 행하는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 전쟁이다. 전쟁만 하는 정치라면 그건 백성의 안녕을 해치는 지름길이다. 전쟁을 위해서라면 국회의원보다 쌈 잘하는 장군을 뽑아야 되지 않겠는가? 보복만으로 세상은 바뀔 수 없다. 응징의 악순환고리를 끊어야 새로운 세상이 열릴 수 있다. 그 피바람 속에서 살고 있는 백성은 무슨 죄로 난세를 살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아도 힘든 세상을~
조선시대 패주였던 연산군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기록되고 있다. 즉위 초기 의욕적으로 정책을 시행하던 연산군은 폐비 어머니 사건 영향으로 복수하는 증오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결과 각종 패악, 패륜을 저지르며 31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하늘을 찌르는 그의 원한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공정한 안목을 눈멀게 했기 때문이다. 그가 집권한 동안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불안했을 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중국 22개의 성중, 하나에 불과한 광둥성(廣東省:면적 177,900㎢)보다도 훨씬 작은 대한민국(100,210㎢)에 언제부터 동서간, 남북간, 세대간 대립의 구도가 생겼는가? 정치적 야망을 위해 패 갈음을 구조적으로 심어놓고, 이를 강화하여 표 얻는데 이용했던 주범이 바로 정치인이 아니었던가?
극단적인 패 갈음과 독선은 타자에 대한 폭력이 되고 결국은 그 폭력의 메아리가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던가? 더 나아가 국론을 분열하고 국민을 싸움꾼으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유권자가 부여해준 공권력을 사적 용도로 사용하면 그게 바로 권력남용이 되고, 그 공권력을 땅에 묻어두고 있으면 그게 바로 직무유기다. 유권자는 섬김의 대상이지 군림의 대상이 아니다. 공적 권력은 사적 복수의 칼이 아니다. 백성을 내 사적 싸움에 끌어들이지 마라. 공적으로 ‘소 잡는 칼’로 사적으로 ‘닭 잡는 일’에 사용하지 마라.
춤판에서는 춤 잘 추는 자가 우상이고, 놀음판에서는 놀음 잘하는 자가 우상이며, 골프장에서는 공 잘치는 사람이, 노래방에서는 노래 잘하는 사람이 우상이다. 그것은 우리가 인정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만의 리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판은 다르다. 전 국가가 판이고 전 국민이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지위’로 말한 것은 그 직위에 있을 동안만 유효하고, ‘돈’으로 말한 것은 돈 떨어지기 전까지만 유효하고, ‘욕망’으로 말한 것은 그 속내가 들키기 전 까지만 유효하고, ‘화’를 내면서 한 말은 그 순간만, 그것도 겉으로만 유효하다는 사실을 당선된 정치인은 한시도 잊지 않기를 강조하며 이번 국회는 쌈 잘하는 국회의원보다 일 잘하는 국회의원이 더 인정받는 국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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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사) 서울이코노미포럼 공동대표
한국공감소통연구소 대표/더뉴스24 주필
전 HCN지속협 대표회장
전 ㈜ 한림MS 기획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