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서 칼럼] 나훈아가 진한 경상도 사투리로 외쳤다. “텔레비전은 뉴스만 보는데, 이상한 국회의원인지 지랄인지 나와 갖고 하는 꼬라지 보면 속이 뒤틀린다. 그런데 자들을 뭐라 할 일 아이라, 누가 뽑았노. 우리가 안 뽑았나. 우리 책임이다.” 얼마 전 대구에서 가진 연말 콘서트에서 불특정 국회의원을 표적 삼아 8천여 관객에게 던진 걸죽한 일갈이다. 내용은 신랄했고, 위험수위의 비속어까지 섞였지만 그가 누구인가. 76세 ‘가황’ 나훈아 아닌가. 시종 거침없이, 여유와 자신감이 넘쳤고, 관객들은 뜨거운 박수로 응답했다.
‘말 폭행’은 너나없이 공감하는 저출산 문제에서 비롯됐다. “인구 감소가 유럽 흑사병 때보다 더 심하답니더. 정치하는 것들이 이런 걸 따져야 하는 데 안 하니께네. 내래도 나서야지. 으이?” 그러면서 나훈아는 74살에 쌍둥이를 낳은 인도 여성의 기사를 소개했다. 이어 “젊은 것들이 안 낳으니께네 우리라도 낳아야지. 나라를 구하는 마음으로 하나씩 낳읍시다. 내가 청춘을 돌려드릴게, 받으이소”라며 ‘청춘을 돌려다오’를 열창했다. 장내에는 웃음과 박수가 쏟아졌다.
공연 분위기를 전한 한 일간지 기사에는 “역시 나훈아” 등 응원 댓글이 잇따랐다.
나훈아는 무대 발언 한마디 한마디를 공연의 중요한 일부로 여겨 세심하게 준비한다고 한다. 허투루, 즉흥적으로 내뱉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회의원을 안주로 삼은 이번 발언도 사투리 하나하나까지 미리부터 철저히 가다듬어 완성한 ‘꾸짖음’으로 봐야 할 것 같다.
나훈아는 과거 인터뷰에서도 정치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간혹 내놨다.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는 생길 수 없다”는 말도 그 중 하나다. 여기서 위는 ‘할 위(爲)’가 아닌 ‘거짓 위(僞)’로, 정치가 제 할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힌다. 정치에 대한 이러한 소신이 이번 공연에도 작동한 것 같다. 꼴불견 정치에 상처받은 관객들 마음도 풀어주고, ‘이심전심’ 공감하는 분위기로 공연 열기를 띄우려는 계산도 했을 법하다.
“당내 민주주의 질식”, “기득권 챙기기에만 급급”…“진저리 칠 지경”
나훈아의 ‘정치비판’에 관객들 대부분이 호응할 만큼 요즘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는 부정적 인식이 보편화됐다. 정치의 본모습은 사라졌고 배제와 독단, 증오와 독설만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상대방을 인정치 않고 제 갈 길만 가는 형국이다. 실망과 불신을 넘어 ‘정치라면 진저리를 칠 지경’이라는 말이 이제는 새롭지 않다.
총선이 바짝 다가오자 여야 각 당 내부에서 나오고 있는 반성과 비판의 목소리도 이러한 상황에 대한 위기감의 표출로 해석할 수 있다. 내부 비판의 강도는 주류, 비주류의 대립이 첨예한 더불어민주당 쪽이 보다 거세다. 개인적으로 가장 공감한 발언은 이낙연 전 총리의 ‘면역체계 상실’ 지적이다. 그는 “민주당이 내부 다양성과 민주주의라는 면역체계가 건강성을 회복했으나 지금은 리더십과 강성지지자들 영향으로 그 면역체계가 무너졌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내 민주주의가 거의 질식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이재명 대표의 ‘사법리스크’ ‘사당화 논란’에다 ‘개딸’로 불리는 열성지지자들의 막무가내식 행태를 겨냥한 발언이다.
내부 비판은 여권에서도 매섭다. 총선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제 몫 챙기기에만 급급한 영남권 중진 등 ‘기득권자’들의 행태가 계속 도마에 오르고 있다. 여기에다 인사 문제 등과 연관 지은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운영 스타일에 대한 피로감과 반감도 여권에는 부담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여야 모두 총선 전략과 맞물린 ‘면모일신’과 분위기 쇄신을 위해 부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비대위’ 출범은 국면전환을 위해 판을 흔들어보려는 ‘승부수’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국민의 상식과 생각이라는 나침반을 갖고 앞장 서겠다"고 말했다. 이러한 다짐이 제대로 구현된다면 국민적 신뢰는 크게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국민의힘만 변한다고 정치판이 달라지나. 전망은 부정적이다. 총선 다수석 확보가 당면 목표이다 보니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사생결단식 공방만 가열될 개연성이 크다.
김건희 여사 이슈만 해도 그렇다. 야당은 김 여사 주가조작 의혹 특검법을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킨다고 한다. 이 문제는 문재인 정부 검찰이 2년 넘게 샅샅이 수사하고도 혐의점을 찾지 못한 사안이다. 그런데도 민주당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은 ‘김건희 리스크’를 윤석열 정권의 ‘아킬레스 건’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이재명 ‘사법리스크’를 상쇄하겠다는 의도도 분명해 보인다. 이런저런 논란을 차치하고 대통령 부인을 둘러싼 지리한 공방 자체가 정치 불신을 가중시키는 심각한 ‘품격 결핍’인 것은 분명하다.
“정치인도 꿈을 파는 사람”…내년 총선 미래·꿈 가름하는 분수령
나훈아는 “가수는 꿈을 파는 직업”이라고 했다. 가수가 부르는 노래가 그에게는 꿈이다. 그러나 정치인도 가수 못지않게 꿈을 파는 사람이다. 국민 속으로 들어가 국민과 함께 꿈을 키우고 꿈을 이루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 정치는 야생처럼 거칠고 험악하기만 하다. 서로 물고 뜯으며 허송세월하기 일쑤다.
꿈은 현실 정치에서 미래, 희망과 맞닿아 있다. 미래를 준비하고 희망을 살려가며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게 정치의 궁극적 지향점이다. 내년 총선은 정치 지형 변화와 더불어 우리의 미래와 희망을 가름하는 분수령이라는 데 다수가 공감하고 있다. 정치의 일대 쇄신은 기필코 이뤄져야 한다. 국민 다수를 냉소와 무력감에 빠트렸던 21대 국회의 행태가 되풀이 된다면 나라의 미래는 암담해질 수밖에 없다.
공연에서 나훈아는 거듭 신신당부를 했다. “아무데나 길바닥에 절한다고 찍어주지 말고, 단디 찍어야 돼.”
<필자 소개>
-서울이코노미뉴스 부회장
-전 서울이코노미뉴스 대표, 주필
-전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심의실장
-전 서울신문 편집담당 상무
-전 서울신문 사회부장, 정치부장, 논설위원, 편집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