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호 칼럼] 영토, 주권과 함께 국가의 3요소를 이루는 국민은 인구(人口, 사람의 입), 즉 먹여 살려야 할 사람의 수로 나타낸다. 따라서 국민에게 충분한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일은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라 할 수 있다.
식량의 안정적 공급에 문제가 발생하면 사회는 불안정해지며 심할 경우 정권이 붕괴된다. 2007~2008년 세계 곡물 파동으로 30여 국가에서 식량 폭동이 일어나고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권이 붕괴되는 현실을 목도한 바 있다. 주요 선진국은 식량 공급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각 나라의 특성에 맞는 다양한 식량정책을 수립·운영하고 있다.
현대 사회는 식량정책의 적절성 여부에 따라 국민의 영양 상태가 결정된다고 봐야 한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대규모 기근을 경험한 중국은 매년 연초에 발표하는 ‘중앙 1호 문건’에 삼농(농업, 농촌, 농민) 문제를 담아 식량 안보를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명시하고 있다.
미래를 내다본 선제적 식량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한 나라들은 사회 안정과 국가 발전을 성취하지만 장기적인 목표와 비전 없이 임기응변식 대응에 급급한 나라들은 불안정하고 허약한 나라가 된다. 우크라이나가 1년 이상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것도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식량안보지수가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갈수록 더 하락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식량정책은 쌀정책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쌀에 집착해 왔다. 주곡인 쌀 자급이 달성된 1980년대 이전에는 모자라는 쌀의 소비 억제와 자급을 위한 증산 정책에 초점이 맞추어졌으나, 쌀 자급이 달성된 이후에는 생산량보다 쌀값 안정과 농가소득 증대로 무게중심이 옮겨졌다.
지구촌 무역자유화시대가 진전됨에 따라 식량의 세계화·다변화가 대세로 자리 잡았고, 늘어나는 수입식량(밀, 쇠고기, 유제품 등)에 밀려 쌀의 중요도가 전체 열량 공급의 25%를 밑도는 상황이 되면서 쌀 일변도 식량정책이 방향을 잃고 말았다. 20년간 고수했던 쌀시장 개방 유예는 국산 쌀이 넘쳐나는데도 매년 40만t의 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는 부담만 떠안고 백기를 드는 정책 참사로 끝났다. 세계무역기구(WTO)가 존속하는 한 쌀의 완전 자급은 불가능해졌고 자급률이 90%를 밑도는 수준에서 머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쌀 소비 감소와 의무 수입으로 인한 재고량 증가로 가격이 하락하자 정부는 생산억제정책으로 돌아섰다. 곡물자급률이 20%밖에 안 되는 나라에서 곡물 생산을 줄이는 정책이 정당해 보이는 기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쌀 생산억제정책으로 농민의 생산 의욕이 크게 떨어지면서 경지이용률은 1975년 140%에서 2020년 107%로 크게 줄었고 농지면적은 224만ha에서 158만ha로 30%나 감소했다.
한국식량안보연구재단은 지난 10여 년 동안 쌀을 비롯한 주요 작물의 생산 증대와 더불어 소비 확대, 더 나아가 수요 창출을 위한 노력을 촉구해 왔다. 출구 전략이 부재한 가운데 쌀값 조정을 위해 무작정 쌀시장 격리에만 급급하다 보니 쌀은 모두에게 부담을 주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한국인에게 하늘과 같은 존재였던 쌀이 음식문화의 변방으로 밀려나는 역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쌀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소비 확대와 수요 창출 노력이 절실하다.
재단은 식당에서 고품질의 쌀을 사용해 최상의 맛을 내는 밥을 제공하도록 의무화하고, 쌀이 가공식품산업의 원료로 안정적으로 공급돼 다양한 쌀 가공식품이 생산되도록 정책적으로 지원할 것을 정부에 건의하고 있다. 나아가 저소득 취약계층에 쌀을 무상 지원하는 제도와 통일을 대비한 쌀 120만t 상시 비축제도의 입법화를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기조로 한 ‘대한민국 식량안보특별법 초안(가제)’을 관계 당국과 국회의원 전원에게 배포하기도 했다. 윤준병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비롯한 국회의원 12명이 이 초안을 충실히 반영한 ‘식량안보특별법 제정안’을 지난 6월 공동 발의한 것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식량안보위원회를 설치하고 식량 문제를 주요 국정과제로 격상하기 위한 최초의 시도다.
기후 변화와 코로나19 팬데믹,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세계 식량 위기가 가시화하고 있다. 특히 미중 갈등으로 심화되는 남중국해와 대만해협의 긴장 상태는 한반도로 오는 곡물 수송선의 항로를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다. 식량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한국의 식량 안보가 크게 위협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한반도에 위기 상황이 닥치면 고작 2개월분 밖에 안 되는 비축양곡으로는 나라를 지킬 수 없다. 식량 안보는 어느 한 부처가 전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쌀값 안정과 식량 생산 증대, 취약계층 식량 지원, 통일미 비축, 식품산업의 식량 안보 기능 강화, 식량 낭비 줄이기 등이 범국가적 식량 안보 체계 속에서 다뤄져야 한다. 식량안보특별법이 조속히 제정돼 식량 안보가 탄탄한 대한민국으로 거듭나길 염원한다.
#이 칼럼은 "(사)선진사회만들기연대의 '선사연칼럼'을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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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이 철 호 (chlee@korea.com)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식품저장학 박사, 덴마크왕립수의농과대학원)
한국식량안보연구재단 명예이사장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
미국식품공학회·국제식품과학기술한림원 펠로우
前) 한국국제생명공학회장·한국미생물생명공학회장·한국식품과학회장
前) 유엔식량농업기구 자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