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서 칼럼] “억울할 법도 하지. 때를 잘못 만난 탓이야”
설 연휴 직전 문재인 정부 시절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당시 장관 3명이 한 묶음으로 기소됐다는 소식에 스친 생각이다. 백운규 산자‧조명균 통일‧유영민 과기부 전 장관이 그들이다. 당시 청와대 인사수석과 인사비서관도 함께 재판에 넘겨졌다.
혐의는 문재인 정부 초기인 2017년부터 이듬해 4월까지 산하 공공기관장 19명에게 사직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혐의다.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자리에서 버티는 공기업 등 공공기관장들을 퇴진시키려고 ‘총대’를 멨다가 뒤늦게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사정은 다른 부처도 비슷했을 텐데, 이들만 당하는 것은 사퇴 강요 행태가 지나치게 심했거나 어설펐을 개연성이 크다.
이들은 당시에는 별다른 죄의식도 없었고, 정권 초기에 치러지는 관행쯤으로 여겼을 것 같다. 사실 문재인 정권 전까지,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물론,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사퇴 종용을 받기에 앞서 대다수 공공기관장과 임원들 스스로가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물러났다.
그랬기 때문일 것이다. 전직 장관 등 5명이 기소됐다는 소식에 더불어민주당은 “5년 단임 대통령제 하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제도적 문제마저 기소로 앙갚음했다”고 맞받았다. 박홍근 원내대표는 “윤석열식 정치 보복에 기가 막힌다”고 비난했다. ‘필연적인 제도적 문제’, 즉 사퇴를 거부하는 전 정권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기 위해, 그 전에도 관행처럼 되풀이해 온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게 주장의 핵심이다. 재판에 넘겨진 장관 3명도 이 대목에서 가장 억울해 할 것 같다.
‘필연적인 제도적 문제’라도 진즉에 처벌 대상…전직장관 3명 기소로 ‘버팀목’ 추가
하지만 ‘필연적인 제도적 문제’를 단죄한 것은 문재인 정부가 먼저다. 집권 초기 ‘적폐청산’의 기치 아래 당시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이유로 박근혜 정부의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정무수석을 기소했다.
이후에는 문재인 정부 당시 김은경 환경부 장관도 ‘블랙리스트’ 건으로 처벌을 받았다. 지난해 1월 대법원에서 징역 2년6개월을 확정 판결받고 복역 중이다. 환경부 산하 공공기관 임원들에게 사표를 받고 점찍은 인물들을 후임으로 앉힌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문 정부로서는 김기춘 전 실장 등을 처벌한 데 대한 ‘부메랑’을 맞은 셈이다.
민주당의 맞대응에 대해 ‘내로남불’이라는 비난이 제기된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기소된 전직 장관들이 억울해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지만, 민주당이 대놓고 옹호할 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김은경 전 장관에 대한 대법원 판례는 문 정부 출신 공공기관장들이 자리를 지키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임기가 남는 사람에게 사퇴를 강요하는 것 자체가 처벌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이번에 전직 장관 등 5명이 같은 이유로 기소됐으니 ‘버팀목’ 하나가 추가됐다고도 볼 수 있다.
문 정부 때 임명된 공공기관 기관장과 임원들은 작년 말 기준 전체의 86%를 차지하고 있다. 350개 공공기관의 기관장‧임원 3080명 중 2655명이 문 정부 때 임명됐다. 특히 기관장 가운데 59명은 문 정부 임기 종료 6개월을 남기고 임명된 이른바 ‘알박기’ 케이스다. 이들의 임기는 내년 말이나 내후년 초까지다.
이러한 ‘불편한 동거’에 대한 정권 차원의 ‘비상수단’은 계속 가동될 것은 분명하다. 과거에 늘상 그랬고, 지금도 진행 중인 것처럼 보이는 ‘찍어내기’ ‘먼지털기’식 감사와 수사가 그것이다. 개인 비리 등을 문제 삼아 스스로 물러나게 만들겠다는 ‘사퇴압박’ 수단이다. 정치적, 도덕적으로야 비난받을 소지가 크지만 법적으로야 문제 될 것은 없다.
해당 기관장이나 임원으로서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감사나 수사의 칼날을 걱정하며 노심초사 할 수밖에 없다.
한 공공기관 기관장은 정권교체 이후부터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전용차는 근무시간을 철저히 따져 이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법인카드는 아예 없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유흥업소 출입도 당연히 피하고 있다. 꼬투리 잡힐 여지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그의 임기는 내년 10월까지다.
낙인찍힌 기관장 조직내서도 ‘기피대상’…‘아름다운 퇴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지만 이렇게 애를 써도 ‘눈칫밥’ 신세는 면하기 어렵다. 전 정권 사람이라는 낙인 때문에 조직 내에서는 ‘이단자’ 취급을 받으며 ‘기피대상’일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인사권과 결재권을 앞세우더라도 한계는 있다. 조직원들로서도 불편함과 부담감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기관장에게 잘 해주고 싶어도 자칫 ‘부역자’로 찍혀 언젠가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구속된 방통위원회 실무 과장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문 정부 때인 2020년 TV조선 재승인 심사를 맡은 일부 심사위원들에게 점수를 깎도록 종용했다는 게 그의 혐의다. 이러한 혐의는 정권 교체 후 감사원의 강도 높은 감사를 통해 드러났다. 감사 자체가 물러나지 않고 버티고 있는 한상혁 방통위원장을 겨냥한 ‘사퇴 압박용’이었다는 점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해당 과장이 치명적 ‘유탄’을 맞은 셈이다.
논란의 확실한 해결책은 대통령과 공공기관장의 임기를 일치시키도록 관련법을 만드는 것이다. 여야는 지난해 11월 이를 위한 ‘3+3 협의체’를 만들어 운영 중이다. 야당도 그 필요성에 공감한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이 정부 산하 기관장만 대상으로 하고 정무직 기관장은 제외하자고 주장하면서 논의는 겉돌고 있다. 정무직 기관장을 거론한 것은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상혁 방통위원장과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이재명 ‘사법리스크’까지 겹쳐 험악해지고 있는 여야의 대치 국면으로 미루어 합의 처리는 ‘부지하세월’이 될 공산이 크다.
공공기관은 정부의 정책을 집행하거나 지원하는 조직이다. 앞 정권 코드에 맞춰 일했던 사람들이 새 정권에 맞춰 크게 달라진 정책을 수행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 지난 정권에서 자질과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하더라도, 정권이 바뀌면서 그 용도는 폐기된 것과 다름없다.
윤석열 정부와 국정방향이 맞지 않는 공기업 기관장들은 물러나는 것이 옳다. 여야가 대통령과 공공기관장의 임기를 일치시킨다는 데까지는 공감한 상황이니만큼 버티기의 명분은 사라졌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는 다짐 속에 ‘단일대오’로 임기를 지키려는 시도는 부질없게 돼 버렸다.
기관장 쯤 됐으면 우리 사회의 명실상부한 지도층이다. 저간의 사정을 접고 이제는 공직자의 올바른 처신, ‘아름다운 퇴진’를 진지하게 고민해주었으면 한다. 주변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소신과 목표는 욕심이고 망상이기 십상이다.
<필자 소개>
-서울이코노미뉴스 부회장
-전 서울이코노미뉴스 대표, 주필
-전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심의실장
-전 서울신문 편집담당 상무
-전 서울신문 사회부장, 정치부장, 논설위원, 편집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