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지난 10일 오후 본사 편집국에 걸려온 전화다.
“더불어민주당 전해철 의원실 비서관입니다. 저희 의원님은 KT 고액후원자를 알지도 못합니다. 후원명단에 KT라고 써있는 것도 아니고요. 저희가 KT후원금을 받았다가 돌려준 것은 맞지만 이를 받아놓고 '문제가 될까봐' 반환한 것이 아닙니다.”
황창규 KT회장이 국회의원들에게 수억 원대 불법 정치 후원을 한 혐의로 지난 4월 경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은 사건이 뒤늦게 국회로 ‘불똥’이 튀고 있다. 전해철 의원은 오래 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500만원(4명이 100만원씩 400만원, 다른 1명은 90만원과 10만원 도합 100만원)을 기부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달 전 쯤 한 방송사로부터 이 500만원의 기부자가 KT라는 얘기를 전해듣고 곧바로 반환을 했다는 것이 전 의원실의 해명이다. 이 비서관에 따르면 1주일에 한번씩 회계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전 의원이 이미 받은 500만원이 KT로부터 온 사실을 뒤늦게 알고 반환을 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본지가 이날 ‘[심층취재] 정치자금 '편법제공' 황창규 KT 회장, 경찰 수사 안하나, 못하나?’ 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하며 전해철 의원이 500만원을 받았다가 반환했다는 내용을 보도하자 애써 해명을 위해서 비서관이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평소 KT 황창규 회장 측과 특별한 인연이나 보은관계에 있지 않다고 적극적으로 설명했다.
"전해철 의원처럼 KT로부터 돈을 받은 의원 가운데 '선의의 피해자' 많을 수도 있다"
황창규 회장은 KT임원들이 국회의원들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데 관여한 혐의로 경찰조사를 받았다. 황 회장 등은 2014년 5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회사 자금으로 사들인 상품권을 되팔아 마련한 비자금 11억5000여만원 중 4억4190만원을 19, 20대 국회의원 99명에게 임직원 명의로 금액을 나눠 후원한 혐의(정치자금법 위반)를 받고 있다.
KT임원들이 법인카드로 상품권을 구매한 뒤, 이를 현금화해 국회의원들에게 일명 '쪼개기' 방식으로 정치자금을 낸 것으로 의심하는 것이다. 현행 정치자금법에 따르면 법인단체의 정치자금 기부는 금지돼 있다. 하지만 개인이 기부할 경우 300만원을 넘어야 외부에 공개된다. 경찰은 이 부분을 주목한다. KT가 이런 허점을 노려 ‘쪼개기 후원’을 해온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다.
그렇다면 전해철 의원이 누구인가. 문재인 정부를 출범시켜 이른바 ‘3철’로 불리는 실세급 거물 정치인이다. 여기에 그는 금융부문을 담당하는 국회정무위원회 소속 위원이다. 만일 황 회장이 후원에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 후원금의 목적은 무엇인지에 대해 집중 조사가 이뤄졌다면 초점은 자연스럽게 여기에 맞춰진다. KT가 주요 주주인 인터넷 전문은행 관련 입법 사안을 다루는 국회 상임위가 바로 정무위원회이기 때문이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연루 의혹으로 퇴진 압박을 받던 황창규 회장은 지난해 연임에 성공했다. 올들어 지배구조 개편안을 확정하는등 돌파구를 모색해 왔다. 하지만, 경찰에 피의자로 입건되면서 시민단체와 KT 새노조 등으로부터 황 회장에 대한 퇴진 압박이 거세진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마저도 검찰은 지난달 보강수사를 하라며 황 회장과 전현직 임원 등 4명에 대해 경찰이 신청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경찰은 KT 전 현직 임원들이 2014년부터 2017년까지 3년간, 국회의원 90여 명에게 법인자금 4억 3천여만 원을 건넨 구체적인 증거를 추가조사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전해철 의원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KT로부터 돈을 받은 의원 가운데 '선의의 피해자'가 많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전 민주당 원내대표우원식 의원, 김영주 노동부장관, 박지원 의원 등 거물정치인들이 들어 있다. 특히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도전했을 정도로 여권내 입지가 강한 우상호(1,300만원) 의원은 1000만원 이상을 받은 8명 중 1명이다. 우 의원은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과 고교 동문이기도 하다.
"KT, 일단 '무작정 기부' 후 의원들로부터 선처-배려 받으려고 했을 것이라는 추리 가능"
이밖에 후원금을 받은 의원 99명 중 18명은 반납했다. 7명은 전액을, 나머지는 일부 반환했다. 전액 반환한 의원은 문미옥(사퇴) 현 청와대 과학기술보좌관(300만 원), 신경민 의원(300만 원), 윤종오(상실) 전 의원(300만 원), 전해철 의원(500만 원), 지상욱 의원(500만 원), 최명길(상실) 전 의원(200만 원), 최운열 의원(500만 원) 등이다. 이 가운데 신 의원은 10만 원 단위로 들어온 후원금까지 모두 돌려보냈다.
일부 반환한 의원은 김광림 의원(900만 원 중 500만 원),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500만 원 중 290만 원), 김용태 의원(500만 원 중 400만 원), 김종석 의원(500만 원 중 200만 원), 김한표 의원(400만 원 중 300만 원), 박민식 의원(700만 원 중 200만 원), 박지원 의원(500만 원 중 200만 원), 박홍근 의원(1,100만 원 중 100만 원), 유의동 의원(1,400만 원 중 200만 원), 이채익 의원(900만 원 중 800만 원), 조해진 의원(1,500만 원 중 200만 원) 등이다.
본지가 다른 의원실까지 전수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이들 정치인들의 명단을 훑어보면 ‘호화 캐스팅’을 방불케 한다. KT로서는 정치자금 기부를 통해서 충분히 로비를 벌일 가치가 있는 정치인들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소속 국회 상임위가 정무위원회 또는 통신을 담당하는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위원이라면 이같은 심증이 더욱 짙어진다.
전 의원실의 주장처럼 기부자를 잘 모르는(나중에 알게될 지 모르지만) 의원들이 많은게 사실이라면 이는 KT가 일단 '무작정 기부'를 한 다음에 의원들로부터 선처나 배려를 받으려고 했을 것이라는 추리가 가능하다. 지금도 일부 기업들은 임원 급여에 후원금을 지급하고, 임원이 국회의원을 후원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KT도 같은 기업의 입장에서 이러한 방법을 똑같이 원용했을 수가 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은 경찰은 7개월 넘게 수사하고도 정작 돈을 받은 정치인이나 보좌진 등에 대한 조사는 전혀 하지 않은 것이다. 검찰도 이 부분을 문제 삼았다. 경찰은 KT가 자금 출처를 감추기 위해 이러한 수법으로 후원금을 내고 국회에 로비를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정치자금법상 법인이나 단체는 정치자금을 기부할 수 없는 탓이다.
본지, KT 후원금 사태서 피해 입었다고 주장하는 국회의원들로부터 많은 제보-고발 희망
우리 국민들은 모두가 공정사회를 외치고 있다. ‘초일류 정보통신’을 외치는 KT 황창규 회장과 같은 국민기업의 CEO가 뇌물혐의로 수사기관에 드나드는 현실은 분명히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다. 더우기 KT는 국회의원들에게 일명 '쪼개기' 방식으로 정치자금을 냈다고 한다. 물론 KT 측은 국회의원 후원이 황 회장 이전부터 관행적으로 이뤄져 왔고 황 회장은 관련 내용을 보고받은 적이 없다고 억울해 한다.
그러나 KT같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기업의 임원들이 법인카드로 상품권을 구매한 뒤, 이를 현금화해 정치자금을 냈다면 이야 말로 체통과 권위에 흠이 가는 일로 비춰진다.
일반적으로 힘있는 정치인들에게 접근해서 이권을 얻거나 호가호위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정치 불나방’이라고 한다. 국민기업인 KT가 본연의 정보통신사업을 실력으로 승부하지 않고 정치인들에게 ‘편법기부’를 하는 방식으로 이득을 취하려고 했다면 이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해철 의원처럼 내용도 모르고 돈을 받았다가 나중에 출처를 알고 돈을 반환한 것을 놓고 공연히 ‘구설수’에 오르거나 마음고생을 하는 정치인들이 있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본지는 이번 KT 후원금 사태에서 혹시라도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국회의원들로부터 더욱 많은 제보와 고발을 희망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은 KT나 황창규 회장이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서 '정도경영'을 정착케 하고, 더 이상 '정치 불나방'같은 논란이나 불씨를 만들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