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사회-'을들의 반격'
갑을사회-'을들의 반격'
  • 정종석 발행인
  • 승인 2015.01.11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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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에 숨죽였던 '미생'들..'깨어있는 을'들의 자각

 
한국사회에서 술자리의 의미는 서구사회와 다르다. 직장에서 업무가 끝난 뒤 갖는 회식자리의 술은 또 다른 뜻이 있다. 상하관계가 명확한 회사에서의 회식은 업무의 연장이다. 여기에서 정신력을 시험받는가 하면 업무와 관련한 수 많은 사담이 오간다. 동료애를 좌우할 친목이 도모되며 때로는 살아가는 중요한 정보를 얻기도 한다.

그리고 중요한 또 한 가지는 술자리가 낮시간 대의 업무 능력 외의 ‘생존의 마당’으로 활용된다는 점이다. 특히 영업사원들이 술자리를 잘 이용하면 계약을 따내서 능력을 인정받고, 직장에서 살아남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상사에게 잘 보이고 거래처에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한 ‘을(乙)’의 술자리는 언제나 고달프다.
 
얼마 전 직장인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많은 인기를 끌었던 TV드라마 ‘미생’에서의 술자리는 이렇다. 영업3팀 오상식 과장(이성민 분)은 2차 접대를 요구하는 ‘중동 메카폰’ 사업의 ‘갑(甲)’ 문충기 대표의 접대를 맡게 됐다. ‘2차 접대는 없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오 과장은 1차 술자리에서 문 대표를 만취시키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문 대표는 30분에 40도짜리 양주 1병씩을 마시는 불세출의 주당이다. 정면승부의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모든 면에서 철저히 ‘을(乙)’인 미생의 영업 3팀은 살아남기 위해 각종 작전을 세운다. 숙취해소음료 마시기, 전화 받는 척 나가기, 위스키와 홍차 바꿔 마시기, 수건에 술 뱉기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여 ‘갑(甲)’을 눕히고 계약을 따내려한다. 영업 3팀 ‘을(乙)의 생존법’, 과연 통했을까? 그러나 결과는 아쉽게도 ‘절대 갑(甲)’ 문 대표를 술로 이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을(乙)’이 술자리에서 어떻게 해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갑을 이기기란 쉽지 않은 탓이다. 물론 오 과장의 ‘숨겨진 전략’으로 술자리에선 패배했다. 하지만 결말이 '해피엔딩'으로 끝난 것은 을의 처지에서는 무척 다행이었다.
 
최근 우리 사회는 어느 때보다 갑을문화 속에서의 ‘갑질 논란’이 한창이다. 지난 해 말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이른바 ‘땅콩회황’이 불을 지른 가운데 경기도의 현대백화점 지하주차장에서 아르바이트생을 무릎 꿇린 사건까지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이번에는 수습사원 전원해고로 논란을 빚은 국내 3대 소셜 커머스 업체인 위메프는 물론 청년노동력 착취로 비난받는 유명 디자이너 이상봉 씨에 대해 고용노동부가 관련 업종에 대해해도 조사에 나선다고 한다.
 
사회 전반에 갑을관계가 고착된 가운데 그동안 일상화된 ‘갑질’에 참고 지내던 ‘을의 반격’이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되는 느낌이다. 며칠 전 한 커피전문점에서 ‘을의 반격’이 눈길을 끈다. 엔제리너스커피는 고객의 말투에 따라 커피값을 깎아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커피점에서 할인을 받는 방법은 간단하다. 명찰에 적힌 바리스타 이름을 부르며 “안녕하세요? ○○씨, 맛있는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라고 정중하게 주문하면 아메리카노를 50% 할인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라고만 말해도 20% 할인을 받을 수 있다.
 
원래 ‘갑(甲)’과 ‘을(乙)’은 순서나 우열을 나타날 때 쓰는 명사다. 영문 계약서에서는 A와 B로 표현하거나 the one과 the former로 표현한다. 이야 말로 일방과 그 상대방을 가리킨다. 따라서 관계의 불평등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적어도 대한민국의 경우는 그렇다. 특히 서양의 갑을관계와 달리 우리나라는 수직적이고 주종(主從)적인 성격까지 내포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가 생존에 목을 매단 영원한 을이 아닐까.  우리는 ‘이익’이라는 ‘지존의 가치’에 함몰돼 버린 지 오래다. 모두가 갑이 되고 싶어 하지만 결국은 을일 수 밖에 없다. 서로가 경쟁과 성공지상주의에 내몰린 탓이다.
 
몇 년 전 절친한 후배가 쓴 ‘을의 생존법’이란 책이 생각난다. 지난 1997년 여름, 신문사에 근무하고 있던 한 기자가 갑작스럽게 광고부서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다른 기자들도 영업과 광고부서로 뿔뿔이 흩어졌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의 폭풍이 신문사를 덮친 것이다. 그는 난생 처음 광고국에서 3개월이란 짧은 시간 동안 ‘을’의 삶을 체험했다. 기업을 대상으로 영업하면서, 이전까지 몰랐던 세상의 벽과 부딪친 것이다. 이른바 ‘을 인생’의 서막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는 진짜 을은 아니었다. 기자신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편집국에 복귀한 뒤 직장을 옮기면서 ‘생존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3년뒤 그는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몸과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고, 나름 멋진 아이디어를 앞세워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엔 갑이 된 줄 알았다. 작지만 버젓한 사업체에 을인 직원 네댓 명도 거느렸다. 자부심도 생겼다. 그러나 실은 갑이 된 것이 아니라 다시 을로 시작했을 뿐이었다. 그가 시작한 사업은 인터넷신문사. 주요 포털 사이트에 필요한 뉴스를 제공하는 업체였다. 아쉬운 소리라곤 별로 해본 적 없었던 그는 처음으로 뉴스라는 ‘물건’을 팔기 위해 거래처를 돌아다녔다. 사무실로 돌아와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거기엔 책임져야 할 을들이 있었고, 자신은 그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는 또 다른 을에 불과했다.
 
‘땅콩회항’ 파동에서 대한항공은 수차례 잘못된 판단과 행동으로 조현아 전 부사장뿐 아니라 여러 사람이 구속 기소되는 길로 끌고 들어갔다. 이 사실이 처음 알려졌을 때 대한항공은 살짝 버무린 ‘책임전가 사과문’을 내놓았다. 조 전 부사장이 기내 서비스를 지적한 것은 회사 임원으로서 당연한 행동이었고, 사무장 등의 잘못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국민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대한항공은 사건 직후 피해자인 박창진 사무장 등을 상대로 조 전 부사장이 잘못이 없는 방향으로 거짓 진술을 할 것을 회유·협박했다.
 
대한항공과 국토부가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사건을 덮으려고 했음에도 사실이 밝혀진 것은 피해자 등의 용기와 시민단체의 노력 덕분이었다. 박 사무장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내가 내 모든 것을 잃더라도 이것은 아니다”라며 기내에서 발생했던 일을 폭로했다. 직장생활 내내 철저히 ‘을’이었던 그가 ‘슈퍼갑’ 조현아를 KO시킨 ‘피니시 블로우(finish blow)’였던 셈이다. 일등석 승객은 검찰에 나가 목격한 사실을 가감 없이 진술했다. 
 
‘땅콩회항’사건은 힘 있는 ‘갑’이 힘없는 ‘을‘에게 부당한 행위를 했을 경우 엄벌을 받는다는 선례로 오래도록 기록될 것이다. 국토부와 대한항공처럼 감독기관과 피감독기관이 유착하는 일도 ’갑들‘이 서로 간에 기득권을 유지하는 수단이다. 이번 기회에 이런 것들이 깨지고 뿌리가 뽑혀야만 약자인 ’을‘들이 평화롭게 숨을 쉬면서 살 수 있는 세상이 올 것이다. 우리가 과연 갑인가, 을인가하는 물음은 현실세계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갑이라고 해서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
 
모든 비즈니스는 갑을관계로 이뤄진다. 갑은 발주자며 을은 수주자다. 갑은 고용자고 을을 피고용자다. 서로가 동등한 입장일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갑의 행동에 따라서 을의 상황은 달라진다. 을은 갑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 세상에 만만한 갑이 어디에도 없다. 처음엔 속을 다 내어줄 것처럼 하다가도 어느 정도 필요를 채우고 나면 냉정한 갑을관계로 돌아간다. 그 갑을관계에 기대서 살 수 밖에 없는게 바로 을의 처지이자 입장이다. 그래서 갑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라면 자존심을 물론 술도 사고 상납도 한다.
 
드라마 미생의 장그래는 아마 이와 비슷한 현실세계의 갑을관계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가 비록 정규직으로 재탄생을 하는데 성공하지 못했을 지라도 그는 비정규직 '을' 생활에서 소중한 인생의 체험을 했다. 이를 토대로 현실적인 인생을 살 수 있는 참공부를 한 덕분이다. 온 세상이 모두 '갑들의 천국'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세상은 결국 '깨어 있는 을'들에 의해서 의해 움직인다. 그렇다면 오늘 비록 을일지라도 우리가 전향적인 사고와 자세로 임한다면 현재 어디에 있든 궁극적인 성공은 을들의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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