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방지(方智)는 중국 하남 사람으로 신라 문무왕 9년(서기669년) 당나라 문화 사절로 신라에 왔다. 설총과 함께 동방유학과 예교(禮敎)의 진흥에 힘쓰다 우리나라에 정착한다. 그 후 상주에 정착하여 살았기 때문에 상주란 본관을 사용했다. 그 후 방운이 온수(온양)군에 봉해짐에 따라 온양으로 개관하게 되었다. 시조인 방지로부터 방운 까지는 문헌이 없어져서 방운을 1세 조상으로 하고 있다. 후손들이 번창하면서 몇 개 본관으로 갈라진다. 그러나 온양 외에 다른 본관은 각각 몇 천 명에 불과하고 온양방씨가 주류를 이룬다.
1세조 방운 은 고려 왕건을 도와 공을 세운 뒤 온양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온양을 본관으로 삼았다. 15세손 방유정은 태조 이성계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태조는 고려 때 나라에서 방씨 가문에 내려준 온양의 땅을 몰수했다. 또한 온양방씨의 혼이 담긴 온양의 배방산(拜方山)을 ‘방씨를 배척한다’는 뜻에서 배방산(排方山)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온양방씨 22세손 방진(보성군수)의 사위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의 처숙(妻叔) 뻘인 방덕룡을 비롯 방응원 등 방씨 집안의 남아들이 노량진 해전에서 선봉장이 되어 싸우다 모두 전사한다.
소년문학의 선구자 방정환은 방씨 가문이 낳은 큰 별이다. 서울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했던 방경주의 맏아들인 그는 10세 때 이미 동네 친구들과‘소년입지회’를 조직할 만큼 일찍 깬 인물이다. 방정환은 19세에 의암 손병희의 눈에 들어 셋째 사위가 된다. 1922년 잡지‘어린이’를 발간하면서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 뒤 색동회를 조직하고 5월1일을 어린이날로 정했다.
방응모는 1932년 운영난에 빠진 조선일보를 거액을 투자, 인수 운영했으며 1940년 8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자 출판사인‘조광사(朝光社)’를 경영하기도 했다. 그 후 8.15광복과 동시에 조선일보를 복간, 민족언론의 창달에 노력해 오다 1950년 납북되었다. 조선일보 방일영 회장, 방우영 사장은 바로 그의 손자이다.
자선사업가 방애인(1909-1933)은 황주 출신이다. 그녀는 1926년 개성호수돈여학교를 졸업, 기독교인으로 1931년 전주기전여학교 교사가 되어 불우한 학생들을 도우면서 신앙생활을 했다. 8천여 가정을 방문하여 기부금을 모아 고아원을 설립하고, 1932년 전주 수재민을 위해 사재를 털어 구호했다. 죽은 후 전주의 여인들이 흰옷을 입고 상여를 맨 사실로도 유명하다.
그밖에 현대인물은 방순원(대법원판사), 방인근(독립운동가), 방인근(문인), 방기환(소설가), 방찬영(미국캘리포니아대 아시아태평양문제연구소장), 방희(육군중장,주스페인대사), 방순동(경희대명예교수), 방영웅(작가), 방상훈(조선일보부사장), 방곤(경희대교수), 방길남(관세청장비관리과장), 방남준(혜광학원이사장), 방동석(서울시의회부의장), 방동식(한국도로공사기술본부장), 방동환(치안본부총경), 방도원(강원일보상무), 방만수(국회의원), 방민근(한학자), 방병순(삼화건공(주)사장), 방희선(인천지법판사), 방수원(사회사업가), 방영부(한양대사무부처장), 방영석(광우건설(주)사장), 방영섭(대한조선공사전무), 방영자(임마누엘학원장), 방영헌(병원이사장), 방용석(화수회충북지부장), 방이식(한국과학기술원기술실장), 방일홍(국회의원), 방인식(치안본부총경), 방인후(대구고검사무국장), 방제환(경기도농림국장), 방주협(서광건설(주)사장), 방준필(안기부서울분실장), 방상교(군수,화수회충남지부장), 방성출(국회의원), 방석기(서울역장), 방숙(순천향대교수), 방순동(경희대명예교수), 방순문(면목전신전화국장), 방선정(정신목재사회장), 방선기(명예맹산군수), 방승옥(단양산업(주)회장), 방양섭(화수회전남지부장), 방양식(화수회회장), 방재기(변호사), 방준경(판사), 방철환(법관), 방영구(광주카톨릭대학장), 방정복(상명여대교수), 방태수(극단에저또창립대표), 방태영(코리아타임스이사), 방대영(논노(주)수석부사장), 방대윤(한일개발(주)이사), 방민환(대우증권(주)상무), 방상길(고려합섬(주)상무), 방수진(고합상사(주)전무), 방영일(현대전자(주)이사), 방우제(충남대교수), 방종걸(산업기지개발공사댐관리본부장), 방정순(상명여대총장), 방종만(미주상호신용금고전무), 방지영(진흥기업(주)전무), 방한열(한일은행이사)방혜자(여류화가), 방현(변호사), 방홍석((주)삼원주택사장), 방효선(중부국세처장), 방해주(천지실업(주)대표이사), 방치웅(방치과의원)씨 등이다. (무순, 전 현직 구분 안 됨)
항렬자는 31世 호(浩) 순(淳) 처(處), 32世 동(東) 재(裁) 진(鎭), 33世 문(文) 용(容) 원(源), 34世 찬(瓚) 효(孝) 정(楨), 35世 혁(赫) 석(錫) 종(鍾), 36世 제(濟) 승(承) 규(圭), 37世 식(植), 38世 병(炳), 39世 배(培), 40世 호(鎬), 41世 태(泰), 42世 병(秉), 43世 열(烈), 44世 기(基), 45世 현(鉉), 46世 해(海), 47世 래(來), 48世 희(熙), 49世 주(周), 50世 용(鎔)이다.
주요파는 판서공파, 간의공파, 안렴사공파, 태상경공파, 대장군공파, 상락부원군파, 광록대부공파 등이다. 집성촌은 경남 합천군 적중면 상부리, 경남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가술리, 평남 순천군 순천읍 설봉리 등이다.
본관 온양은 충청남도 아산시에 위치한 지명이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온수군(溫水郡)으로 고쳤다. 1441년(세종 23)에 왕이 온천에 행차한 후 병에 차도가 있어 온양군으로 승격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이후에도 역대 왕들은 이곳 온천에 자주 행차하였다. 1914년 온양군은 아산군·신창군과 함께 아산군으로 통합됐다. 1973년 온양읍이 1986년에 시로 승격, 아산군에서 분리되었다. 1995년 온양시와 아산군을 통합하여 아산시가 되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모두 137명이 있다. 문과 8명, 무과 20명, 사마시 14명, 역과 49명, 의과 36명, 음양과 3명, 율과 4명, 주학 3명 등이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온양방씨는 1985년에는 총 17,933가구 75,290명, 2000년에는 총 19,961가구 64,128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5년 만에 2천여 가구가 늘어났다. 반면 인구는 오히려 1만1천여 명이 줄어들었다. 조사과정에서 어떤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5년 당시 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는 서울 20,904명, 부산 4,819명, 대구 2,959명, 인천 4,414명, 경기 13,566명, 강원 4,069명, 충북 2,487명, 충남 8,847명, 전북 1,288명, 전남 2,910명, 경북 4,725명, 경남 4,029명, 제주 248명이다. 서울, 경기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충남지역에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 현재는 서울 15,307명, 부산 3,304명, 대구 2,507명, 인천 5,705명, 광주 585명, 대전 1,772명, 울산 1,136명, 경기 16,481명, 강원 2,909명, 충북 2,177명, 충남 5,035명, 전북 651명, 전남 1,102명, 경북 3,148명, 경남 2,078명, 제주 231명이다. 충남과 대전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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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정복규 프로필
● 전북매일 편집국장, 논설위원
● 익산신문 사장
● 현재 새전북신문 수석 논설위원
● 현재 성씨 전문강사(한국의 성씨를 통한 역사탐구)
( 저 서 )
• 한국의 성씨: 성씨를 찾아서
• 한국의 성씨: 1,2권
• 칼럼집: 숲이 좋으면 새가 날아든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핸드폰이 세상을 지배한다/ 개성있는 인재를 키워라
• 유머집: 각하 코드를 맞추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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