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이광(李匡)은 고려 인종 4년에 태어나 고려 명종 때 태사(太師)를 역임하고 광록대부로 추밀원부사에 올랐다. 후에 백오(白烏.평창의 옛이름)군에 봉해졌다. 태사(太師)는 고려 시대 임금의 고문을 맡은 정일품 벼슬이다. 태부(太傅), 태보(太保)와 함께 삼사(三師)라 불렸는데 이 중 가장 높은 벼슬이었다. 혹은 고려 시대 동궁에 속하여 왕세자의 교육을 맡아보던 종일품 벼슬도 태사(太師)라고 했다. 광록대부는 고려 시대 문관 벼슬의 계급으로 문종 때 종삼품(從三品)으로 제정되었다.
이광의 8세손 이천기(李天驥)는 고려 공민왕 때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역임한 후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불사이군의 충절로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장단(長湍)으로 내려가 절의를 지켰다. 후에 태조 이성계가 그 충절을 가상히 여겨 평창군(平昌君)에 봉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평창으로 하였다. 한 때 이거명의 셋째 아들 이윤장(李潤張)이 시조로 알려져 왔으나 조선 숙종 때의 갑자보가 위조된 것으로 밝혀져 시조를 이광으로 확정했다.
평창이씨의 중시조격인 이천기(李天驥)는 고려 말에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지냈는데 그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와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25명을 배출했다. 이천기의 증손자인 이영서(李永瑞)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예조정랑을 지냈는데 특히 서예로 이름이 높았다.
이영서의 아들 이계남, 이계동 형제가 뛰어났다. 이계남은 연산군 때 이조판서에 이르렀고 중종반정 공신에 올랐으며 이계동은 역시 연산군 때 병조를 거쳐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한국 가톨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이승훈(李承薰.1756-1801)은 천주교인 이얼을 만나 입교를 결심하고 1783년 청나라에 가서 천주교의 교리를 익혔다. 그 후 예수회의 신부에게 영세를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영세신자가 되었다. 그는 교리서적과 십자가상을 가지고 귀국하여 주일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에 힘썼다. 그러다 체포되어 가족들의 권유로 배교(背敎)했다가 다시 교회활동을 시작하여 자신이 주교가 되어 성사(聖事)를 집행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의금부의 취조를 받고 사형 당했다. 1868년 아들 이신규와 손자 이재의가 순교, 1871년 증손 이연귀, 이균귀가 각각 순교함으로써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내었다.
이승훈의 아들 이신규(1793-1868)는 천주교인으로 교명은 도마이다. 어머니는 정약용의 누이다. 그는 1801년 아버지가 순교하자 인천으로 이사하여 교리 전파에 힘썼다. 1868년 체포되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했다.
이영춘(李永春,1903~1980)은 평남 용강 출신으로 호는 쌍천(雙泉)이다. 평양고등보통학교 및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을 거쳤고 전북 군산의 일본인 농장인 구마모토 농장의 자혜진료소에 부임했다. 1935년 일본 교토 제국대학에서 국내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해방 후 농촌위생연구소와 개정중앙병원을 개원하였다. 화호여중학교, 개정간호대학, 모세스영아원 등을 설립했던 그는‘한국의 슈바이쳐', '예방의학의 선구자', '공중보건의 개척자'라 불린다. 그가 생전에 살던 구마모토가 지은 한식, 양식, 일식의 복합 건축양식의 가옥은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00호로 지정되었고‘쌍천 영춘 기념관’으로 조성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현대인물은 이순권(해방후 민정관), 이정규(성균관대총장), 이봉모(국회의원), 이경진(국회의원), 이한림(육군중장,건설부장관), 이태모(한양대병원장,국회의원), 이종진(서울대교수), 이영희(한양대교수), 이영창(한양대교수), 이석우(경희대교수), 이정길(서울대교수), 이광웅(서울대교수), 이경석(서울대교수), 이달호(연세대교수), 이종숙(이화여대교수), 이정규(성균관대교수), 이영덕(서울대교수), 이인균(서울대교수), 이근무(서울대교수), 이주삼(연세대교수), 이주원(건국대교수), 이문원(숙명여대교수), 이홍균(서울지방법원의정부지청장), 이관모(공군준장), 이장섭(부장검사), 이대용(육군준장,주월공사), 이주희(한전병원장), 이영대(고교교장), 이준모(한신대교수), 이명섭(고교교장), 이종석(호암아트홀관장), 이영모(고교교장), 이압림(원주시교육장), 이성모(교장), 이영헌(고교교장), 이형중(고교교장), 이주수(병원장), 이윤근(판사), 이주황(한양대교수), 이기영(부장판사), 이원모(고교교장), 이영섭(경무관), 이영덕(서울대교수), 이수춘(정치인), 이재균(미국서큐리그대교수), 이영균(미국위스콘신대교수), 이진국(부산대교수), 이연호(육군준장), 이용석(공학박사), 이민우(중앙일보부장), 이호섭(음악가), 이상요(의학박사), 이철희(의학박사), 이남준(의학박사), 이종범(의학박사), 이은섭(국방대학원교수), 이영원(의학박사), 이석봉(육군준장), 이종각(대한제분회장), 이종성(경찰서장), 이수교(제주도립병원장), 이극호(철도청국장,홍익회회장)씨 등이 있다. (무순, 전 현직 구분 안 됨)
본관 평창(平昌)은 신라 경순왕 때에 백오현(白烏縣)이라 개칭하여 내성군(奈城郡: 영월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인 평창현으로 이름을 개칭되었다. 1392년(태조 1)에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穆祖)의 비 효경왕후 이씨의 고향이라 하여 평창군으로 승격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집성촌은 강원도 회양군 상북면 하진평리,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회룡리, 전남 해남군 화원면 산호리, 강원도 양구군 일원,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금수리, 강원도 평강군 현내면 하복리, 경북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일원,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일원, 함북 무산군 삼장면 농사동, 강원도 인제군, 강원도 정선군,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일원, 황해도 신계군 다율면, 평북 초산군 강면 용성동, 함남 안변군 등이다.
주요파는 ▲사직공종파 ▲사용공파 ▲수사공파 ▲첨정공파 ▲정숙공파 ▲진사공파 ▲주부공파 ▲부사공파 ▲감정공파 ▲익평공파 ▲평천군파 ▲헌무공파 ▲문열공파 ▲계인군파 ▲평장공파 ▲문경공파 ▲노산부원군파 등이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모두 126명이 있다. 문과 24명, 무과 21명, 사마시 79명, 의과 2명이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평창이씨는 1985년에는 총 13,531가구 55,487명, 2000년에는 총 20,718가구 65,945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5년 만에 7천여 가구, 1만여 명이 늘어났다. 1985년 당시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는 서울 14,846명, 부산 2,233명, 대구 1,045명, 인천 2,217명, 경기 9,036명, 강원 15,917명, 충북 3,137명, 충남 1,592명, 전북 225명, 전남 412명, 경북 2,945명, 경남 1,798명, 제주 84명이다. 강원지역에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었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 현재는 서울 14,821명, 부산 2,528명, 대구 1,448명, 인천 4,380명, 광주 205명, 대전 1,098명, 울산 1,192명, 경기 17,837명, 강원 12,132명, 충북 3,428명, 충남 1,456명, 전북 309명, 전남 456명, 경북 2,808명, 경남 1,697명, 제주 150명이다. 서울, 인천, 경기지역에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살고 있었다. 강원지역에도 여전히 많은 인구가 분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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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정복규 프로필
● 전북매일 편집국장, 논설위원
● 익산신문 사장
● 현재 새전북신문 수석 논설위원
● 현재 성씨 전문강사(한국의 성씨를 통한 역사탐구)
( 저 서 )
• 한국의 성씨: 성씨를 찾아서
• 한국의 성씨: 1,2권
• 칼럼집: 숲이 좋으면 새가 날아든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핸드폰이 세상을 지배한다/ 개성있는 인재를 키워라
• 유머집: 각하 코드를 맞추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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