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이씨는 서로 다른 두 계가 있다. 중국에서 건너와 원주에 정착한 이춘계의 이씨는 ▲원주이씨(구파)라고 한다. 그리고 경주이씨에서 분관된 원주이씨는 ▲원주이씨(신파)라고 한다.
신파의 시조 이신우(李申佑)는 경주이씨 이거명(李居明)의 12세손이다. 그는 1004년(고려 목종 7년) 문과에 급제하여 문종 때 병부상서를 지냈다. 후에 원주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경주이씨에서 분관하여 원주를 본관으로 했다. 따라서 원주이씨 신파 시조의 선대는 신라 6촌장 중의 한 사람인 이알평의 후손이다.
13세손 이반계는 원주이씨의 중흥조(中興祖)다. 고려 공민왕 때 예부상서를 지냈으나 조선이 건국되자 이성계의 등극을 반대했다. 그는 강원도 치악산에 은거하면서 두문불출하고 산에 올라 송경(松京)을 바라보며 고려의 몰락을 슬퍼하였다. 태종이 그를 불렀으나 혀를 깨물고 7일 만에 죽었다. 후에 왕이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경원군(慶源君)을 봉하고 영의정을 내렸다.
이영화(李英華)는 조선 세종 때 감찰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전남 해남의 무진산에 산막을 치고 은거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그를 기려 산막이 있던 마을을 산막리(山幕里)라 하고 그가 묻힌 산을 이영산(李英山)이라고 부른다.
이원해는 선조 18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부정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하였고, 선조 26년 고부군수로 있으면서 무주 방어에 종사하였다. 당시 그가 쌓은 성곽이 매우 견고하여 부근 읍의 모범이 되었다. 후에 병조판서에 증직되고 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이준은 선조 3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형조좌랑을 지냈다. 광해군 4년 이미첨 등이 폐모론을 주장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정자 이름을 귀래정이라 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다시 예조좌랑을 제수받았으며 다시 안흥첨사로 있으면서 유흥치 등의 난 때 정충신의 중군 아장으로 종사하였다. 그 후 선천부사로 제수되어 금산산성을 쌓았으며 춘신사로 심양에 가서 김평을 달래고 나서 의주부윤을 제수받았다. 이때 금나라가 청이라 하고 칭제를 요구하자 강경한 척화론을 주장하여 정세가 험악하자 임경업에게 인계하고 안주목사로 옮겨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귀향했다. 그 뒤에도 영변부사, 춘천부사 등을 역임했다.
원주이씨(신파)는 조선시대에 이빈(李彬, 1597 丁酉生) : 문과(文科) 인조11년(1633) 식년시 병과(丙科), 이석조(李碩祚, 1625 乙丑生) : 문과(文科) 숙종7년(1681) 식년시 병과(丙科), 이만손(李萬孫, 1625 乙丑生) : 문과(文科) 연산군10년(1504) 식년시 병과(丙科), 이태섭(李泰燮, 1847 丁未生) : 문과(文科) 고종13년(1876) 식년시 병과(丙科), 이만림(李萬林, 1627 丁卯生) : 문과(文科) 현종14년(1673) 식년시 병과(丙科), 이언열(李彦烈, 1680 庚申生) : 문과(文科) 숙종40년(1714) 증광시 병과(丙科), 이면(李勉, 1680 庚申生) : 문과(文科) 명종8년(1553) 별시 병과(丙科), 이유원(李惟源, 1600 庚子生) : 문과(文科) 인조17년(1639) 식년시 병과(丙科), 이태령(李泰齡, 1711 辛卯生) : 문과(文科) 영조20년(1744) 식년시 병과(丙科), 이조손(李兆孫, 1711 辛卯生) : 문과(文科) 중종19년(1524) 별시 병과(丙科) 등 모두 135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이 숫자는 신파와 구파의 구분이 안 된 것이다. 급제자를 분야별로 보면 문과 24명, 무과 48명, 사마시 63명이다.
현대인물은 이동림(동국대학원장), 이성일(국회의원), 이원택(중앙대교수), 이형영(전남대교수), 이제남(의학박사), 이석후(육군대령), 이효익(성균관대교수), 이사묵(변호사), 이제국(춘광학원이사장), 이훈동(조선내화(주)사장), 이덕원(광주시동구청장), 이기향(의학박사), 이효복(조선대공대교수), 이제승(한국과학원과장), 이영윤(상명여대교수), 이춘흠(광주시건설국장), 이규경(초등학교교장), 이병석(광주전남고교장), 이효묵(광주동물원장), 이순종(초등학교교장), 이백(목포경찰서장), 이석용(부강공고교장), 이남수(아동문학협회총무),이건택(국방부), 이치묵(종친회장), 이소암(해남군교육장), 이선정(변호사), 이상근(국사편찬위원회자료조사실장)씨 등이 있다. (무순, 전 현직 구분 안 됨)
본관 원주(原州)는 강원도 남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평원군(平原郡) 또는 치악성(雉岳城)인데, 677년(신라 문무왕 17)에 북원소경(北原小京)이었으며 757년(경덕왕 16)에 북원경(北原京)으로 고쳤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원주(原州)로 개칭하였고, 1018년(현종 9)에 군으로 바꾸어 영월군과 제천군을 속군으로 평창현·단산현·영춘현·주천현·황려현을 속현으로 거느린 큰 군이 되었다.
조선에 들어서도 원주목을 유지했으며, 강원도의 관찰사영이 위치한 행정중심지였다. 1683년(숙종 9)과 1728년(영조 4)에 잠시 현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강원도의 감영이 폐지되고 충주부 소속의 원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에 도제 실시로 강원도 원주군이 되었다. 1955년 원주읍이 원주시(原州市)로 승격되고 나머지는 원성군(原城郡)이 되었다. 1989년 원성군을 다시 원주군으로 개칭하였고, 1995년 원주군이 원주시에 통합되었다. 원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원주김씨(原州金氏), 원주석씨(原州石氏), 원주이씨(原州李氏.신파), 원주이씨(原州李氏.구파), 원주변씨(原州邊氏), 원주변씨(原州卞氏), 원주원씨(原州元氏), 원주전씨(原州全氏), 원주최씨(原州崔氏) 등이 있다.
집성촌은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충북 단양군 매포읍, 충북 단양군 적성면, 전남 강진군 성전면, 전남 해남군 계곡면 사정리, 전남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 전남 해남군 마산면, 전남 나주시 공산면 화성리, 전남 진도군 군내면 둔전리, 전남 담양군 담양읍 가산리 등이다. 주요파는 ▲대장군공파 ▲월성군공파…계천공파. 판사공파. 대제학공파. 정산공파. 파주공파. 산음공파. 강릉부사공파. 판도공파 등이 있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원주이씨는 1985년에는 총 13,248가구 56,001명, 2000년에는 총 20,787가구 66,603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5년 만에 7천여 가구, 1만여 명이 늘어났다. 1985년 당시 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를 보면 서울 15,133명, 부산 1,954명, 대구 654명, 인천 1,753명, 경기 7,399명, 강원 7,551명, 충북 2,103명, 충남 1,592명, 전북 1,140명, 전남 14,392명, 경북 798명, 경남 1,135명, 제주 397명이다. 강원과 전남지역에 가장 많은 분포를 보였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 현재는 서울 16,737명, 부산 2,103명, 대구 860명, 인천 3,696명, 광주 4,801명, 대전 1,193명, 울산 551명, 경기 14,813명, 강원 6,751명, 충북 2,195명, 충남 1,328명, 전북 1,093명, 전남 7,941명, 경북 911명, 경남 1,122명, 제주 508명이다. 1985년과 마찬가지로 강원도와 광주, 전남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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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정복규 프로필
● 전북매일 편집국장, 논설위원
● 익산신문 사장
● 현재 새전북신문 수석 논설위원
● 현재 성씨 전문강사(한국의 성씨를 통한 역사탐구)
( 저 서 )
• 한국의 성씨: 성씨를 찾아서
• 한국의 성씨: 1,2권
• 칼럼집: 숲이 좋으면 새가 날아든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핸드폰이 세상을 지배한다/ 개성있는 인재를 키워라
• 유머집: 각하 코드를 맞추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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