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이씨는 시조를 달리하는 3파가 있다. 이인덕(李仁德)을 시조로 받드는 교위공파가 있고, 이은백(李殷伯)을 시조로 하고 이규보를 중조로 모시는 문순공파가 있으며 이세정(李世貞)을 시조로 받드는 경주파가 있다. 이들 선조들은 모두 고려 중기에 경기도 여주 고을에 자리 잡아 대대로 향직을 세습하면서 세력을 떨치던 호족이다.
3파의 여주이씨는 본관의 이름을 각기 조금씩 달리 써왔다. 교위공파에서는 고려 때는 황려(黃驪)라 하였고 조선조 때는 주로 여흥(驪興) 또는 여주(驪州)라 하였으며 간혹 영의(永義)라는 본관을 쓰기도 했다. 문순공파는 고려조 이래 대체로 여주라는 단일 관향을 썼으나 이규보의 후손 가운데 하음(지금의 강화)으로 관향을 삼은 종파가 있었다. 경주파는 여강(驪江)이라는 관향을 정하였다. 그러다가 근년에 이르러 여흥, 영의, 하음 등의 관향 이름을 여주로 단일화했다. 경주파에서 독자적으로 사용한 여강이라는 관향도 여주라는 관향과 함께 쓰기로 했다.
여주이씨의 첫 자리를 차지하는 문순공 이규보(1168-1241.문순공파)는 우리 역사가 낳은 대문호다. 고려 중엽 무인들이 정권을 쥐고 설치던 난세에 한 자루 붓으로 나라를 움직일만한 위치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바로 그 ‘무단(武斷)아래 필봉’이라는 시대상황 때문에 고민한 정치가다. 이규보의 방대한‘동국이상국집’53권은 한문의 종주국인 당시 중국 문인과 지식인들까지 놀라게 했다.
고려가 망하자 수원 광교산에 숨어버린 이고(1338-1420.교위공파)는 이집, 조견과 함께 고려 삼학사로 일컬어진다. 이행(1351-1432.교위공파)은 고려 말 혼란기에 국방. 외교. 산업에 큰 자취를 남긴다. 이성계의 혁명세력과 마지막까지 대결한 인물이다.
이언적(1491-1553.경주파)은 문학의 이규보, 실학의 이익과 더불어 여주이씨 명예를 찬란하게 빛낸 3대 거봉이다. 성호 이익(1681-1763.교위공파)은 문벌정치의 협력을 거부한 재야학자다. 새로운 학풍을 일으킨 실학의 중조다. 그밖에 조선 후기에 실학의 중조격인 성호(星湖) 이익, 근대에 종교운동에 헌신하다가 신유박해 때 남강 이승훈 등과 함께 순교한 이가환. 지리학의 선구자로서 한국의 지리서인‘택리지’일명‘팔역지’를 저술한 이중환, 세조 때 병조판서에 이른 이몽가, 선조 때 형조, 예조판서, 우참찬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된 이우직 등도 후손들이다.
남강 이승훈은 민족교육과 신앙으로 일제 침략에 맞선 민족 지도자다. 일찍이 관서지방의 거상(巨商)이 됐던 남강은 중년에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명 받는다. 그 뒤 전 재산을 털어 오산학교를 세웠으며 기독교인이 됐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검거돼 또다시 3년형을 받는다.
현대인물은 이원경(외무부장관, 합동통신사장), 이규효(건설부장관), 이원호(외교안보연구소연구위원), 이부식(건설부건설진흥국장), 이진성(농수산부영림국장), 이원만(코오롱그룹명예회장), 이원천(원진레이온회장), 이원갑(부산방직회장), 이동찬(코오롱그룹회장), 이동건(부산방직사장), 이우성(성균관대교수), 이기백(한림대교수), 이성무(한국정신문화연구원교수), 이주성(대구고법부장판사), 이필선(제일은행장), 이원달(외무부기획관리실장), 이복형(주아르헨티나대사), 이봉권(서울세관장), 이철형(건설부건설국장), 이인섭(치안감), 이태식(외무부동남아과장), 이민동(철도청기감), 이창환(감사원감사관), 이원(법제처법제관), 이대식(경북도건설국장), 이원식(점촌시장), 이홍열(군수), 이희문(부산시교위장학관), 이성탁(서울시교위시설과장), 이지각(대한잠사회장), 이원진(대구시구청장), 이관섭(상공부과장), 이정구(서울형사지법판사), 이재형(광주지검검사), 이동명(서울민사지법판사), 이동권(마산지법판사), 이성오(부산지법판사), 이윤(변호사), 이흥수(변호사), 이동환(고려대교수), 이흥탁(외국어대교수), 이동과(동국대교수), 이양성(부산대교수), 이대령(경희대교수), 이이형(한양대교수), 이희국(금성반도체건설본부장), 이동인(영남대교수), 이지태(경북대교수), 이원국(과학원교수), 이원해(한양대교수), 이동호(전남대교수), 이필우(건국대교수), 이동휘(외교안보연구원교수), 이명환(계명대교수), 이경섭(경북대교수), 이석재(계명대교수), 이석건(경북대교수), 이동령(서울대교수), 이병선(부산대교수), 이병혁(부산대교수), 이재동(부산대교수), 이수동(국민대교수), 이희석(경북대교수), 이성욱(在카나다교수), 이희발(순천향대교수), 이희경(재미교수), 이희수(在터키교수), 이동호(경상대교수), 이희열(부산대교수), 이신성(부산교대교수), 이배영(호암출판사대표)씨 등이 있다. (무순, 전 현직 구분 안 됨)
집성촌은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우각리, 경북 포항시 북구 기계면, 경북 예천군 용궁면 무이리, 경남 함안군 여항면 내곡리,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경북 고령군 고령읍 중화리, 경남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 등이다.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는 여주이씨가 낳은 조선조 성리학의 거봉 이언적이 태어난 곳이다. 이곳에 여주이씨가 터를 잡은 것은 조선 초 이언적의 증조부 이숭례 때이다. 현재 160여 가구 중 100여 가구가 여주이씨이다. 인근에는 이언적을 모신 옥산서원과 만년에 그가 노닐던 독락당이 있다. 무첨당, 향단, 관가정 등 전형적인 양반가의 한옥들이 40여 채나 남
본관 여주는 경기도 여주군의 지명이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황려현(黃驪縣)으로 바뀌었다가 1018년(현종 9)에 원주에 영속되었다. 1257년(고종 44)에 영의현(永義縣)으로 개편되었고, 1305년(충렬왕 31)에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하였다. 이후 1388년(우왕 14)에 황려부(黃驪府)로 다시 승격하였다가 1389년(공양왕 1) 여흥군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1469년(예종 1)에 세종대왕 능인 영릉(英陵)을 왕대리(旺垈里)로 옮기면서 천령현(川寧縣)을 병합하여 여주목(驪州牧)으로 승격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충주부 여주군이 되었고, 1896년에 경기도 여주군이 되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모두 336명이 있다. 문과 56명, 무과 31명, 사마시 247명, 의과 1명, 주학 1명이다.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여주이씨는 1985년에는 총 15,288가구 61,907명, 2000년에는 총 22,517가구 71,711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5년 만에 7천여 가구, 1만여 명이 늘어났다. 1985년 당시 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는 서울 13,615명, 부산 6,313명, 대구 6,299명, 인천 1,931명, 경기 7,855명, 강원 1,719명, 충북 1,271명, 충남 3,925명, 전북 1,356명, 전남 1,076명, 경북 10,994명, 경남 5,458명, 제주 95명이다. 경북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15년 뒤인 2000년 현재에는 서울 14,514명, 부산 6,460명, 대구 7,344명, 인천 3,413명, 광주 622명, 대전 2,014명, 울산 2,357명, 경기 14,968명, 강원 1,670명, 충북 1,509명, 충남 2,465명, 전북 1,148명, 전남 686명, 경북 8,074명, 경남 4,345명, 제주 122명이다. 경기지역에 가장 많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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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정복규 프로필
● 전북매일 편집국장, 논설위원
● 익산신문 사장
● 현재 새전북신문 수석 논설위원
● 현재 성씨 전문강사(한국의 성씨를 통한 역사탐구)
( 저 서 )
• 한국의 성씨: 성씨를 찾아서
• 한국의 성씨: 1,2권
• 칼럼집: 숲이 좋으면 새가 날아든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핸드폰이 세상을 지배한다/ 개성있는 인재를 키워라
• 유머집: 각하 코드를 맞추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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